해오라비 난초

01_ 해오라비 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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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임을 알려주듯 남자의 코끝이 새빨갰다. 코트에 목도리를 둘둘 말고 화룡점정 팔짱까지 낀 남자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런 남자의 첫인상은 미치도록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길쭉길쭉한 팔다리에 화려한 이목구비 코트와 화려한 패턴의 목도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너무 잘생긴 이목구비에 놀라 턱이 빠졌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외모? 다른 사람이었다면 누가 봐도 여친이 옆에 찰싹 붙어있어도 달려들었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우연은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 정면으로 얼굴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나오는 외모에 여친이 있을 것이라고 혼자 제멋대로 확신한 탓인지, 남자의 얼굴에 반하지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지도 않았다.

'잘생겼네... 여친 기다리나?'


 추운 듯 입김을 후후 불어 손을 데우는 남자의 모습에 역은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화려한 이목구비 때문이겠지. 수군수군 거리며 사랑에 빠진 소녀들처럼 꺅꺅거리는 여자들이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여친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번호 따일 것 같은데 여친분 속 좀 타겠네. 마음에 상처를 입을 여자들을 보며 냉정하게 생각한 우연은 역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꾸벅꾸벅 졸며 머리를 이리로 저리로 흔들고 있을 때였다. 꿀잠을 자고 있던 우연의 머리를 누군가 지나치며 부딪쳤고, 그렇게 우연은 깨고 싶지 않던 꿈에서 깼다.


이번역은 ★★,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확인해보니 어느새 내려야 하는 역이었다. 점점 문이 닫히기 시작했고, 나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아니 할 뻔했다. 문을 가로막고 있는 옆학교 남자애한테 가로막힌 나는 그대로 다음 역으로 출발했다. 

'콜라 마시려고 뚜껑 땄는데 얼굴에 푸확하고 얼굴에 흘려라. 아껴 먹으려고 둔 과자 딱 먹으려는 순간 떨어트려라.'


남몰래 우연은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부으며 다음 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고 올라탔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출에 상념 하며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입김을 후후 불며 역 계단으로 올라오는 남자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역 앞에서 기다리나? 생각했지만 일행처럼 보이는 사람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이미 여친과 만나 데려다 주고 집에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그때 신호가 바뀌었고, 다시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휙휙 지나가고 나무들이 수차례 우연의 옆을 지나쳤다. 한참을 같은 방향만 바라보던 우연은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고 매일 같은 역에서 내리면 똑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역을 빠져나가는 동안 남자의 근처에는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다가가는 여자들뿐 여친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오기가 생겨 급하게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남자를 지켜본 적이 있었다. 말이 지켜본 거였지 훔쳐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얼굴이 발그레해진채 다가갔다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돌아가는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남자 곁에 다가가는 여자는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차가 도착하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나타났나?"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유심히 지켜봤지만, 이번에도 여친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목이 뻐근한 듯 스트레칭을 하고 남자 쪽을 바라보니 아무도 없었다. 우연이 기차를 쳐다보는 동안 어느새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다. 책을 가방에 구깃구깃 집어넣고 똑같이 역을 빠져나가는 우연. 저번에 택시에서 본 것처럼 역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이제서야 집에 가는 듯 신호등을 건너 사라졌다. '어쩌면 여친이 없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에 애써 억 눌러놨던 심장이 뛰기 시작함과 동시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조금은 늦은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