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우정

09.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데

연준은 백번은 더 들었을 카세트테이프를 껐다.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제 동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팔척이 넘는 키로 집안을 쏜살같이 누비고 있었다. 기어코 시위에 가겠다니 연준으로서는 달리 막을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수빈은 어른이고 자기 안전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나이 아니던가.

수빈은 얼굴에다가 수건을 둘렀다. 하얀 수건은 수빈의 눈 바로 아래부터 턱까지를 갑갑해 보일 정도로 가렸다. 결연한 표정으로 집을 나서려던 때 화장실에서 연준이 걸어나왔다. 수빈과 똑같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그게 뭐에요?”
“보면 몰라요? 아 이렇게 하는게 아닌가.”
“그렇게 가리면 최루탄 가스 다 들어오거든요. 근데 왜 그러고 있는 거에요?”


연준이 눈을 도록 굴려 수빈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나가려고요.”
“시위에요?”
“네.”


수빈은 이마를 짚었다. 어제 눈시울이 빨개질 정도로 시위 참석을 막던 연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에 참석하겠다니? 수빈은 떨떠름할 수 밖에 없었다.


“왜요, 저는 이런거 안 하게 생겼나.”
“아니 그게 아니라……”


수빈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도대체 무슨 의중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지금은 사람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중요하니까.


“…진짜 참여하시려고요?”


연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총 맞을 것처럼 나대진 않을 거에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수빈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연준은 공수부대에게 잘못 걸려 뒤지게 맞기 딱 좋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세대에서 이런 건 안 가르쳐주나. 수빈은 자기 수건의 매듭을 보여주었다.


“수건 이렇게 묶으시고요.”
“아, 알겠어요.”
“그리고 공수부대가 쫓아오면 진짜 빨리 튀어야 하는데 그렇게 입고서 달릴 수는 있겠어요?”


그냥 옷 다 갈아입으라고 하지. 수빈이 계속해서 자잘한 것들을 지적하자 연준이 울상을 지었다.


“이건 저도 양보 못해요.”


여기에 목숨 건 사람으로서


“시위를 장난으로 보는건 용납 못하니까.”




연준은 바로 장씨 할머니네 슈퍼로 달려갔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고 할머니도 거리에 안 계신다. 연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할머니가 부디 안전한 곳에 피신해 계시길 바라며 연준은 몸을 일으켰다. 뒤를 힐끗 보니 시위대의 맨 앞에서 목이 터져라 ‘전두환 대통령은 물러나라!’를 외치고 있는 수빈이 보였다. 시위대가 점점 전진함에 따라 공수부대와 더욱 가까워졌다. 공수부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총을 겨누었다. 연준의 동공이 커졌다.


“다들 피해요!!”


그 외침이 신호탄이었던 모양인지 공수부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발사했다. 사람들은 곧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더러는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그와중에도 여전히 전두환 대통령은 물러나라! 를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연준은 도망치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는 공수부대 군인들을 뚫고 시위대의 맨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익숙한 흰 손목을 움켜잡고 무작정 달렸다.


“뭐하는 짓이에요?!”


수빈이 수건을 내리고서 빠르게 쏘아붙였다. 땀에 젖은 얼굴로 헉헉대며 그는 연준을 노려보았다. 좁은 골목 밖으로 도망치는 시위대와 군인들의 인영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발 그럼 거기서 죽으려고요?”


연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빈의 눈에는 경멸이 정말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광주의 끔찍하고 잔인한 소음에 둘은 몇번이고 움찔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빈이 먼저 따지듯이 연준을 올려다보았다.


“목숨이 아까우면 광주에 남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안 아까우니까 그냥 총 맞고 뒤지겠다 그거에요?”
“나한테 도대체 왜 그래요?! 왜 사사건건…!”
“시발 이런다고 달라지냐고!!”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데? 사람이 덜 죽기라도 해? 그게 아니라면 나라에서 잘한다고 뭐라도 준대? 시위해서 달라지는게 뭐야? 더 많은 사상자, 더 많은 피, 더 많은 폭력…그걸 지금 만들고 있잖아! 우리가 저 공수부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태극기 몇번 휘두르고,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지르고,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죽어가면, 그럼 뭐가 달라져?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게 더 이기적인거야, 등신 같은거고! 그건 알아?

연준이 속사포로 소리쳤다. 수빈은 자신의 생각회로가 멈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 그의 평정심과 관대함을 유지해오던 이성이 뚝 끊겼다. 수빈은 연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내가 한 말 귓등으로 쳐먹었죠.”
“달라지냐고? 아뇨, 안 달라지겠죠.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개죽음 당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죠.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연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수빈은 그를 놓아줄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당신같이 비겁하게 숨어있는 사람들 때문에, 저 광주의 사람들은 오늘도 피를 흘리고 억울하게 죽어가야만 하겠죠.”
“……”
“그거 위선이에요, 알아? 무서워서 숨는거, 그딴 식으로 합리화 할 생각하지 마세요.”
“……”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될지 나도 알아요, 안다고!”


말을 할때마다 감정이 격앙되어갔다. 수빈은 자신의 이성을 끌어모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근데 그렇게 숨기만 하고 있다간 아무것도 못 한다는거…그쪽도 알잖아요.”


목소리가 떨렸다. 끝끝내 고개가 숙여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광주에서 그들은 주저앉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잔인한 총탄이 아득하게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