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철은 오늘도 거나하게 한 잔 걸쳤다. 오랜만에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제법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주 다섯잔을 내리 마신 그는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알딸딸 할 정도로 들이부은 알코올이 뱃속에서 꿀렁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단골 술집에서 서비스로 얹어준 쥐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었다. 몇번 지직거리는 소리가 끝나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전두환 각하께서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광주의 빨갱이들을 몰살할 것으로…”
승철은 술이 확 깨었다. 광주라면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있는 곳. 봉쇄되었다고 들었으나 금방 풀릴 줄 알았는데. 승철은 아직 술에 취해있는 팔다리로 제 몸을 더듬어 차 열쇠를 찾아냈다. 아빠가 간다. 승철은 결연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의 낡은 택시를 쓰다듬었다.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그 택시는 마치 승철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제법 힘차게 달려나갔다.
둘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미처 끄지 못한 카세트테이프만 나지막하게 돌아갔는데, 그마저도 플레이어가 고장나기 일쑤였다. 수빈은 화장실 문을 잠그고 오랫동안 욕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잔인한 것인가. 정말이지 좆같았다.
“…나와.”
수빈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되게 자연스럽게 반말하네요?”
“아까 반말 쓰지 말라고 말 안하길래 해도 되나 싶었지. 우리 알고 지낸지 꽤 됐기도 하고. 싫으면 안 할게요.”
황급히 ‘싫으면 안 할게요.’ 하고 덧붙이는 연준이었다. 그러나 수빈은 이제 더는 연준에게 어떤 동지애라던가 그런 것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알긴 뭘 알아요.”
“…”
“이름? 외모? 그 정도 밖에 모르지 않나. 그런건 제3자도 다 아는거거든요.”
오늘 아침에 걸린 수배지 못 봤어요? 수빈이 낮게 중얼거렸다. 연준이 보지 못했을리가 없다. 장씨 할머니네 슈퍼 창문에 커다랗게 붙어있었으니까. 광주 경찰서 출처의 그 수배지에는 시위 현장에서 서둘러 찍은듯한 화질 구린 사진과 수빈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프린트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준은 그걸 꽤 빨리 잊어버렸다. 그것이 둘의 계약에 영향을 주지도 않고, 그보다 더한 것을 보았으니까.
“나에 대해서 딱 남들이 아는 정도 밖에 모르잖아요.”
연준이 조용했다. 또 저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수빈은 이런 자신이 무척이나 찌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연준은 여러모로 수빈에게 버거웠다. 그냥 시위 나가지 말라고 할걸. 수빈은 짜증이 나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노란 택시.”
“…?”
“노란 택시가 광주에 오려고…아냐. 그만 얘기하자.”
이 수수께끼 같은 말에 수빈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말이야. 최루탄 가스를 마시더니 돌았나 싶었다.
“……오든지 말든지.”
수빈이 짜증난다는 듯 내뱉었다.
“…아까 사람들이 너 시위 안 올거냐고 하더라.”
“갈거에요. 누가 안 간대?”
“……”
“따라올 생각 하지 마요.”
수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연준은 화장실 문 앞에서 방으로 느릿한 발걸음을 옮겼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준과 수빈은 아주 이상적인 계약자들의 관계였다. 아니, 계약자 그 이상의 마음도 조금씩 생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왜 하필 지금 둘이서 서로에게 숨 막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연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승철은 군인들이 겹겹이 에워싼 광주 입구를 쳐다보았다. 술은 깬지 오래이고 서울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군청색 밤이었던 하늘은 이제 해가 다시 떠올랐다. 승철은 혀가 바싹바싹 말랐다. 동시에 저런 군인들이 에워싼 곳에서 잔뜩 겁먹었을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승철은 자신의 빛바랜 노란 조끼 주머니에 넣어다니는 사진을 꺼내보았다. 이젠 아빠의 키를 훌쩍 넘어설 정도로 커버린 아들이다. 아들은 보조개가 푹 패이는 환한 웃음으로 다 헐은 사진에서 승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철이 다시 사진을 접어 넣으려는데 헐어버린 사진이 기어이 찢어졌다.
“어이쿠.”
승철이 찍힌 부분이 아들의 것에서 떨어져 흙탕물을 굴렀다. 승철은 웅덩이 속으로 떨어진 자신의 얼굴을 주워들었다. 어떻게 말릴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승철은 그저 아들이 찍힌 조각만을 소중하게 접어 조끼 안에 넣었다.
“수빈아, 겁먹지 마라. 아빠가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