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우정

12. 잃어버린 것

연준은 창백한 얼굴로 수빈을 찾아 인파를 헤치며 뛰어갔다. 사람들을 밀쳐가며 앞으로 나아간 결과 연준은 가만히 서 있는 수빈을 발견했다.


“수빈아!!”


연준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 이름이 불리자 수빈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연준과 눈이 마주친 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저 어떡해요…?”


연준은 한달음에 달려가 수빈을 안았다. 수빈은 목이 메이는듯 끅끅거렸다.


“나…이제…고아에요……”


수빈이 기어코 주저앉았다. 연준은 함께 주저앉으며 수빈을 더 꽉 안아주었다.


“…난 원래부터 고아야.”


연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수빈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었다. 연준은 가까스로 수빈을 부축해 빠져나왔다. 다 울고 나니 원래 하얗던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있었고 멍하니 초점 없는 눈만 까만 빛을 띄었다. 수빈은 비틀거리며 걷다가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았다.


“어디가요…?”


다시 집 밖을 나서는 연준의 등을 향해 수빈이 물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준은 잠시 수빈을 바라보았다.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진 사람은 마치 홀로 세상에 내팽개쳐진 어린아이 같았다. 연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버님 눈 편히 감게 해드려야지.”
“같이 가요.”
“아냐, 여기 있어. 계엄군들 쫙 깔렸잖아.”


연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거리로 나갔다. 흙먼지가 묻은 멋들어진 청바지의 앞주머니에서 연준은 작게 구긴 종이뭉치를 꺼내보았다. 연세대 입학할 적에 찍은 사진은 연준을 향해 꽤나 기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래에는 시시한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생포하여 가까운 군부대에 넘길 시 사례금…그 부분은 또 찢겼는지 없어져 있었다. 제법 선량한 시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의 사진 위에 쓰인 ‘현상수배’는 많이 낯설었다. 그리고 이 수배지의 출처는 안봐도 뻔했다.


“아까 그 택시 기사분, 어디 계세요?”


연준은 하얀 천으로 덮은 수빈의 아버지와 마주하였다. 두 사람은 어딘가 오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리고 저와 제 아버지도 그러하리라 연준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연준은 잠시 수빈의 아버지를 바라본 다음 다시 천을 덮었다. 수빈의 미래를 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서웠다. 사망자들을 모아 놓은 병원의 한 방에서 연준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승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을 잡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놓았다. 승철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연준은 수빈의 아버지가 화장터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약 70키로의 사람이 2.7킬로그램이 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준은 유골함을 품에 안았다.





“왔어요?”
“여기.”


연준은 유골함을 내밀었다. 수빈은 여전히 텅빈 눈으로 그것을 받아보았다.


“저녁 해야겠죠? 오늘도 장씨 할머니네 슈퍼에요?”
“아니.”


연준은 목이 콱 메는 것을 느꼈다. 덤덤하게 말하려는 그의 목에서 목소리가 자꾸만 떨려서 수만 갈래로 갈라져 나왔다. 수빈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꾹 쥔 연준의 손이 떨리고 있었음이며, 일그러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표정이 수빈의 것과 같은 슬픔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장씨 할머니, 이제 슈퍼 못하셔.”



영원히.





수빈은 웬일로 커다란 맥주를 사서 가져다 놓았다. 먼저 마셔요. 수빈이 그렇게 이야기하며 맥주를 쭉 들이켰다. 수빈의 손크기만한 맥주잔이 단번에 비었다. 먼저 마시라며. 연준이 말했다. 수빈은 아랑곳 않고 다 마신 맥주잔에 또 맥주를 부었다.


“무슨 사이였어요?”
“누구랑?”
“장씨 할머니요.”


장씨 할머니는 유골함에 담을 수가 없었다. 계엄군의 트럭이 그를 가져갔으니. 연준은 눈앞에서 놓쳐버린 할머니를 생각하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나 이 얘기 해도 돼?”
“해도 되는 이야기는 뭐고 하면 안되는 이야기는 또 뭐예요. 형답지 않네.”
“네가 나 싫어할까봐 그러지.”


수빈은 맥주잔을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게 중요해요?


“…우리 할머니야. 장씨 할머니.”


수빈은 입을 헤벌렸다. 술이 확 깨네요. 수빈이 제 볼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좀 내가 생각해도 불효자에 호로자식이었어. 할머니가 치매를 걸리시니까 요양원에 넣어버렸거든. 돈이 그렇게나 많았는데도. 난 어릴때부터 할머니가 너무 불쌍했어. 할머니가 거의 완전히 기억을 잃고 나니 아버지는 그냥 요양원에서도 빼내버렸으니까. 내 돈으로 저 슈퍼를 샀어. 우리 할머니 꿈이 슈퍼 주인이셨거든. 개쌍놈 같은 우리 아버지, 아예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서울에서 최대한 멀리에서 하고 싶은거 하고 사시라고…우리 할머니는 나도 기억 못하셨어.”


연준은 잠시 망설였다. 수없이 입을 달싹이는 연준을 수빈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사람 죽이는 군인이었어.”


연준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파란 연대 과잠이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었다. 수빈은 연준의 잔에 맥주를 더 따라주었다. 그 말을 뱉기까지 정말 오랜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 죽이는 아버지 대신에 난 사람을 살리고 싶었어.”


기어코 연준이 흐느꼈다.


“적어도 이제 뭘 해야 할지는 알았어요.”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 수빈이 말했다. 자꾸만 눈앞에서 아빠가 어른거렸다. 샛노란 택시를 운전하는 걸 보며 내 꿈은 택시 운전사라고 말하던 기억, 택시 운전사 아빠는 창피하다고 학부모 총회때 오지 말라고 했던 기억, 그럼에도 누구보다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아빠의 기억이 수빈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그 유명한 함무라비가 말했다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렇다면 총에는 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