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자마자 연준은 요란스레 울리는 전화벨을 마주했다. 진탕 소리를 지른 후라 목이 칼칼했다. 여보세요. 그 식상한 말 뒤에 전혀 식상하지 않은 목소리 때문에 연준은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목은 왜 그렇게 쉬었어. 역시 데모하는구나.”
“아버지가 왜…”
“다 아는 방법이 있다. 너 휴학했다며? 도대체 어떻게 빌어먹고 살련지, 원.”
준현이 혀를 끌끌 찼다. 연준은 수화기 선을 더 꽉 쥐었다. 수빈이 이상하게 바라보는게 느껴졌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후들거리는 몸을 지탱할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드라이브에서 너무 힘을 뺐나. 연준은 더듬거리며 의지할 무언가를 절실히 찾아 헤맸다.
“서로 가족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 본론만 짧게 말하마.”
“…”
“죽고 싶은거 아니면 순순히 서울로 올라와.”
준현이 내뱉듯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만년필을 집어던지는 소리가 났다. 연준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 이름 대면서 전화해보라 하면 나갈 수 있어.”
“왜…왜 갑자기…”
“말 좀 더듬지 마라. 사내새끼가 그렇게 유약해서야.”
연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고쳐잡고 입을 열었다. 자식이 보기에도 호로자식. 개쌍놈. 천하의 불효자. 그래 이딴 작자와 가족이 되는건 연준도 원하지 않았다. 연준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좀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더 더러워지기만 했다. 수빈의 끈질긴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연준은 대답 대신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꺼냈다. 요새 이러저러한 일이 많다보니 노래도 잘 못 들었는데 좀 짬이 난 게 다행이었다.
“형은 이문세 좋아하나봐요?”
“어. 당연하지.”
딸깍. 연준이 테이프를 플레이어 안에 넣었다. 금방이라도 수명이 다하려는 듯 털털거리던 플레이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문세의 음성을 뱉어냈다.
“그러고보니 맨날 이거만 듣던데.”
“할머니가 주신건데 어떻게 맨날 안 들어.”
“아 어쩐지 테이프부터 광채가 나더라고요.”
연준이 픽 웃었다. 입에 모터 달린 줄 알겠다. 수빈은 멋쩍게 웃었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돼요 연준이 조용히 흥얼거렸다. 수빈은 그 속에서 연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서러웠다. 찬란한 청춘, 그래 그 푸를 청을 춘 앞에 욱여넣은 이름을 단 세월을 이토록 흘려보내는 것이 문득 아깝게 느껴졌다. 그 사이 카세트테이프는 노래 한 곡이 끝났다. 수빈은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다.
“…청춘이 다 뭐에요.”
연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수빈의 옆에 누웠다.
“그러게.”
내일 전투 있거든요. 수빈이 말했다. 휘말리지 말고 안전하게 집에 있어요. 양쪽 다 적으로 간주할테니까. 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관두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예 못을 박아버리네. 너털웃음을 지었다. 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픽 웃었다.
“무서워요.”
수빈이 말했다.
“나도.”
연준이 말했다.
“총을 들어야 한다는게 너무 싫어요.”
수빈이 말했다.
“나도.”
연준이 말했다. 수빈은 그 길로 조용히 울었다. 청춘이 다 뭐에요. 수빈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울먹이며 말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청춘은 왜 푸를 청을 쓰는거죠…? 난…나는…파랗고 낮은 담에 칠해진…허울뿐인 가짜 구름에 손바닥을 대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곧 무너질 것의 참혹한 너머를 내가 알고 있는데…왜…누가…자꾸 나를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허울 좋은 담벼락에 가두는 거에요…?”
“…시인 같다.”
전생에 시인이었나. 날 밝으면 기지 말고 신문사나 가라. 누가 아냐? 그걸로 돈 벌 수 있을지. 연준이 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수빈은 늘상 그랬던 웃음 대신 코를 한번 훌쩍였다.
“…다치지 마. 죽지도 말고.”
잘자. 연준이 말했다.
형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왜 죽였을까요. 총도 제대로 장전할 줄 모르는 제가 총으로 사람을 쏴서 죽였어요. 군인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구잡이로 날뛰는 기관총 세례를 받았는데 나중에 시신을 보니 품 속에 가족사진이 있었어요. 형도 들어서 알겠지만 거의 두시간 동안 내리 총질을 했어요. 우리가 숨어서 공격해서 계엄군들은 죄다 당하기만 했는데 증오하던 저 인간들이 여느 사람들처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가슴에 뭐가 얹힌 기분이에요. 형, 내일도 전투를 할거래요. 앞으로 며칠간은 집에 못 갈 거 같아요. 미리 먹을거 구해놔서 다행이에요. 도대체 얼마나 싸워야 이 미친 지옥은 끝날까요. 아빠만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다 죽여버리고 싶은데 벌써부터 너무 지긋지긋해요. 아, 맞다.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다쳐버렸어요.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았거든요. 다행히 급소를 비껴가서 병원에서 쉽게 치료했어요. 근데 흉터는 남을거래요(지금은 보기 흉한 딱지가 앉아 있어요). 난 그 흉터로 이 광주의 봄을 기억하게 되겠죠?
추신: 형이 준 이문세 카세트테이프는 잘 듣고 있어요. 같은 시민군 아저씨들한테 들려드렸더니 인기가 많아졌어요. 그렇게 달가운건 아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