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우정

15. 편지들

오늘 진짜 오랜만에 많이 걸었어. 계엄군들이 다 깔려있어서 너무 무서웠는데도 말이지. 나 이제 깡이 좀 생긴거 같은데?
의예과다 보니 난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전공책 챙겨온게 천만다행이지. 처음에는 무서워서 지혈하는 것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 총알을 빼내는 것도 익숙해졌어. 의사분들도 간호사분들도 모두 나한테 잘해주셔. 다들 피에 찌들어있지만 여전히 미소는 잃지 않아. 멋있는 사람들인것 같아.
수빈아
여긴 너무 많은 생명들이 오고 가. 내가 말했지? 사람 살리고 싶어서 의예과 왔다고. 근데 하루에 실려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놓쳐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처음에는 누군가 죽으면 그날 하루는 꼬박 울기만 했는데 며칠 하니까 무뎌진 것 같아. 생사를 오고 가는 이 피묻은 병원 속에서 난 계속 너를 찾아. 의사 선생님이 시민군 중에 하나라고 소리치며 들것을 끌고 오실 때는 가슴이 계속 철렁 떨어지는거 있지.
방금 또 누군가 들어왔어. 이만 줄일게.

-1980.5.28.최연준





형이 편지를 쓰는 모습은 잘 상상이 안되네요. 스쿠터 타던게 너무 인상적이었나. 우리는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꾸준히 작은 승리들을 거두고 있어요. 전투를 하고 있으면 너무 허무해서 뛰쳐나가고 싶어져요. 고작 몇초의 희열을 위해 옆에서 누군가가 계속 쓰러지고 죽고 다쳐요. 나 너무 무서운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서….
며칠 전에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천막을 치고 밥을 해주셨어요. 살림재주 없는 아저씨들이 하는 음식은 정말 투박하기 짝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 기분이었어요. 다들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에요. 모두 며칠 굶은 거지처럼 게걸스럽게 먹더라고요. 참 이번에 젊은 신문사장님 한분을 만나서 친해졌어요. 대학을 졸업하고서 바로 신문사를 차렸는데 광주가 심상치 않아 취재하러 왔다고 하셨어요. 이름은 강태현이래요. 할아버지의 큰형의 이름에서 따온 건데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했어요. 정작 그분은 할아버지가 태어나는 것도 보지 못하셨지만요. 아무튼 아저씨들 사이를 누비며 수첩에 바쁘게 무언갈 적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이제 저희는 잘 시간이에요. 밤이 깊었네요. 어제 밤새도록 보초를 서서 지금은 머리만 대면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편지는 내일 부칠게요.

-1980.5.29.최수빈





받자마자 편지 써. 네가 거기서 그렇게 힘들어할 줄 알았으면 내가 매달려서라도 막았을텐데. 그래도 친해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난 네가 너무 걱정돼. 죽을까봐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은 네 마음이 너무 걱정돼. 처음에 넌 그저 옳은 일이니까 시위했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넌 그저 복수심 하나로, 죄책감 하나로 싸우는 것 같아. 그러지 마. 오로지 너로, 네가 처음에 품었던 그 마음으로 싸워. 복수로도 싸우지 말고 슬픔으로 싸우지도 말고.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어두운 이야기를 해야겠네. 계엄군이 한명 왔었어. 배에 총을 맞았는데 끽해야 너와 동갑일 것 같았어. 저멀리 싸움터에서 여기까지 혼자 기어서 왔는지 피로 얼룩진 군복에는 흙먼지로 뿌얘진 이름이 보였어. 최범규라고. 다들 군복을 보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 나도 마찬가지였고. 솔직히 그 어린애한테 분노가 잠깐 들기도 했어. 우리 할머니가 계속 생각났거든.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데 그 애가 내 바짓자락을 두 손가락으로 겨우 움켜쥐고 날 올려다보는거야. 그리고 다 갈라진 입술로 나지막하게 말했어. 살려달라고. 계속 살려달라고만 했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고 의사 선생님들도 어차피 죽을테니 헛수고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걔를 외면할 수가 없었어. 겨우 총알은 빼냈는데 이미 장기가 너무 많이 손상돼서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 그래서 난 그냥 걔 옆에 있었어. 수술실에서 단 둘이. 범규가 입을 열어서 그랬어, 집에 가고 싶다고. 우린 잠깐 이야기를 했고(내가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만 했지만) 걔는 1980년 5월 30일 14시 29분에 죽었어.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은 끝이 날까?

-1980.5.30.최연준





연준은 제 피묻은 장갑을 낀 손에 얹힌 힘없는 무게를 느꼈다. 살리려고 온갖 짓을 다 했지만 순 허사였다. 고등학생 티가 나는 그 어린 군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무서워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는거…많이 아플까요…?”
“……”


연준은 대답 대신 그 힘없는 얼룩진 손을 잡았다.


“사람을…죽이고 싶지 않았어요…. 빨갱이니까…죽여도 된다고…그랬는데……내가 죽인건…빨갱이가 아니라 사람이었어요…”


기어코 어린 군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군인은 울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헛수고였다.


“엄마가 날 뭐라고 생각할까요…?”


연준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 죽음이라는 것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그를 짓눌러 왔으므로, 그리고 똑같이 얼룩져버린 청춘 앞에서 동정심이 들었으므로. 때마침 아득히 들려오는 또 다른 사망선고 목소리가 곧 제 것으로 들렸기 때문에.


“…집에 가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군인의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