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을 더 뻗거라"
“이렇게 말입니까..?

“이게 벌써 몇 번째인 줄 아느냐?어르신께서는 왜 너를 가르치라 하시어..”
그 말에 아이는 어깨를 흠칫 떨었어. 그러자 태형은 못할 말을 뱉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
“..다시 해보거라. 손 끝에 힘을 주면 더 멀리 뻗을 수 있을게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싣거라"
그 말에 아이는 다시 팔을 곱게 들어 손을 뻗었어.
*
송씨는 아이가 외워야 할 범의 춤의 기초를 태형에게 알려주라 일렀어. 물론 태형은 거절했지만 송씨는 태형을 불러 앉히고 말했지.
“싫습니다. 수많은 범무당 중 하필이면 어찌 저란말입니까. 더구나 범의 춤은 어르신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것 아닙니까"
“아직 연화는 일곱 밖에 되지 않은 아이다. 급할 필요 없다는게지. 모든 것이 아니라 기초만 일러주면 된다"

“..굳이 범의 춤을 알리려 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송씨를 바로 쳐다본 태형이 말을 이었어.
“어르신도 보셨지 않습니까. 그저 방울을 흔들어 창귀를 보거든 우리 범무당 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범을 찾을 눈을 가진 아입니다"
“태형아"
“저는.. 저 아이를 인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창귀를 붙잡아두려다 먹히기도 하고 범을 찾다 죽기도 하고 심지어는 범을 잘못 찾아 신께 노여움을 사는 것이 저희입니다"
굳세고 단단해보이던 태형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어. 흔들리던 눈이 송씨와 마주쳤을 땐 일렁이는 파도가 눈 안을 가득 메우고있었지.

“헌데 어찌 어르신께서는 이 모든 희생과 노력을 무시하십니까"
“..내가 제일 잘 안다. 그 희생과 노력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느냐"
“그럼 저 아이를 범무녀의 자리에서 내치시어 고을의 무당으로 키워주십시오"
“태형아.. 내 말을 잠시 들어보거라"
*
“형님!”
넓은 뒷마당을 뛰어들어온 건 곱상한 얼굴에 맑은 눈을 가진 사내였어. 태형과 같이 매화가 그려진 갑옷을 입고 붉은 노리개를 한 것을 보니 범무당 같았지.
태형은 그 남자를 보고 아이에게 손을 보이며 잠시 쉬라 말했어. 그러곤 사내에게 걸어갔지.
“범은"
“잡았습니다. 붙어있던 창귀는 총 여섯밖에 되지 않더군요"
“여섯.. 예상대로 적네. 100년 밖에 살지 않았으니 그럴 법 해"
“헌데.. 이 아이는 무엇입니까?”
“어르신께서 범무녀로 만들겠다 들이셨어. 네가 범을 잡으러 갈 때 온 아이니 보름 쯤 됐을까 싶어"
곱상한 얼굴의 그 사내는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어.

“전 가의 정국이다. 매화 댁을 대표하는 두 번째 범 무당이니 잘 지내보자"
“..서 가의 연화입니다..”
연화의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흔든 뒤 놓아준 정국은 환하게 웃어보였어. 그 모습을 보던 태형이 말했지.
“연화 너는*술시(19~21시)가 되거든 이 마당으로 다시 나오거라. 그때 하나부터 다섯까지의 동작을 다시 볼 터이니"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신의 처소로 향했어. 아이의 처소는 매화 댁의 제일 안쪽에 있는 곳으로 붉은 매화 둘러 쌓여 아름답고 향기로운 곳이었어. 하지만 붉은 매화와 대비되게 처소의 이름은 ‘푸른 눈물'이라는 뜻의 [청루(블루 티어스)]였어.
아이가 뒷마당을 나간 뒤 정국과 태형은 태형의 처소로 향했어. 태형은 어찌 정국에게 할 말이 많아보였지.
*
“범을 보는 눈이 진짜 있던겁니까..?
“아까 그 아이가 그 눈을 가졌더라"
“형님께서는.. 보셨습니까..?
“잡아들인 창귀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범의 행색을 알았으니 더 할 말이 없지"
“..이걸 좋아라 해야하는겁니까"
정국은 한숨을 푹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어.
“그런데 어찌 범의 춤을 배운단 말입니까?그런 눈을 가지고서 배우지 않아도 될턴데요"
“어르신께서 부탁하신 일이야. 더구나 범무녀가 되겠다 선택한 건 저 아이고"

“네..? 7살 먹은 저 아이가요?”
*
송씨의 말을 월향은 아이에게 선택지를 주었어.
“연화야. 범무녀가 되기 싫다면 그냥 가도 돼. 신께서 너를 예뻐하셔 선택지를 주시나봐. 신내림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셨어"
“…”
“어떻게 할래?지금 나와 갈래 아니면 여기 남아 범무녀가 될래?”
“..저는.. 할래요… 범무녀, 할래요"
*
“자기 입으로 그리 했다라..”

“..범에게 가족을 잃었대. 유일하게 아껴주던 어미까지, 희고 푸른 눈을 가진 범에게"
“그런 아이를 어찌 돌봐주지 않으십니까?형님께서도 참 너무하십니다"
“몰랐어. 그런 줄 몰랐으니 어찌하겠느냐?”
“처음부터 인정 못하겠다 말씀하신 건 형님이었습니다"
“춤에는 소질이 없어보이긴 하다만"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그 아이가 가련해서 잘 해주렵니다. 청루당 맞지요?”
정국은 찻잔을 내려놓고 청루당으로 향했어.
*

“여기는 길을 쉽게 잃습니다. 저와 같이 가지 않으시렵니까?”
“어이구 깜짝이야.. 젊은 청년이 예의도 바르구먼"
“제가 올 해 스물 하고도 다섯이나 됩니다"
“장가는 들었는가?”
“하하..”
“내 딸이 참 고운데 자네같은 청년을 사위삼고 싶구만"
“따님 이름은 무엇입니까?”
“최애향일세. 왜, 마음에 드는가?”
“나이는 어찌 됩니까?”
“열 하고 여덟일세. 시집 갈 나이로는 한창이지"
“아랫마을에 사시는게지요?”
“그렇지. 근데 어찌 고을로 가는 게 맞는가?”
“거의 다 왔습니다. 가는 길이 심심하온데 이야기나 하나 해드리지요"
[이곳은 산신께서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나무꾼들이 잘 오지 않지요.
산신의 힘이온지 달빛의 힘이온지 사람들이 이 숲만 들어오면 빙글빙글 돌며 길을 잃는다합니다.
그때 사람 하나가 나와 길을 찾아준다며 가자한다면 절대 따라가선 아니되지요. 아마 그 사람은 이곳을 빙글빙글 돌다 산신께 물려 떠난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혹여 따라갔다면 절대 아무 말도 해서는 아니됩니다. 가족을 묻는다면 더더욱이죠. 그걸 듣고서는 산신의 저녁밥으로 갖다바칠지 모르는것이니 말입니다.
나타난 그 사람이 안내한 곳은 어쩌면 산신의 보금자리 앞일지도 모르겠지요.]

“스산한 것이 무섭구만.. 그래서 고을엔 언제 도착하는가?”
“최 가의 애향. 맞지요?”
“..자네..”
“끼긱.. 끼,끽.. 고맙소. 나 대신 끽.. 큭.. 산신의 목덜미에 붙어 끼킥,끽.. 잘 살아보시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아아.. 가족은 걱정마시게"

“내가 곧 산신께 데려올 터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