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2년이 지나갔어. 아이는 아침부터 범의 춤을 익히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는 길에 누군가와 부딪쳤어.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아이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지.
“연화야!괜찮아?”
“아..”
팔을 붙잡아 일으켜준 건 정국이었지. 옷에 묻은 흙을 살살 털어주고서 툇마루에 앉혀주었어.

“어디 보자. 다친데는 없어?갑옷이 부딪치면 꽤 아플터인데..”
“저기.. 정국님..”
“응?”
“이곳에 있는 모든 무당,무녀분들께서는 저를 피하십니다.. 춤을 알려주시는 태형님께서도 저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신데.. 어찌 저를..”
“우와..”
“네..?
“너랑 이렇게 말하는 게 처음이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오해할 뻔 했어"
그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 끝을 보았어.
“나는 네가 좋다. 너를 피하는 이유도 정당치 않다고 생각하니 피하지 마. 특히 너를 보면 내 누이를 보는 듯 하기도 하고"
정국은 끙차 소리를 내며 아이의 옆에 앉았어. 그러곤 말했지.

“나는 이곳에 열이 되던 해 왔어. 내가 지금 열 하고 일곱이니 꽤 오래 전 일이지"
“..어찌 이곳에 오셨습니까..?
“누이가 창귀에게 물려갔었어. 누이는 일곱이였고"
“아.. 죄송합니다..”
“아니다. 벌써 오래전 일인데 무얼 그래. 아버지는 무당을 구하러 가시다 심히 다치시고 그 후로 어머니는 곡기를 끊으시고는 돌아가셨어"
“그래서..”

“창귀의 본 모습은 무당만 알 수 있다더라고. 부모님께서 보신 건 선비의 모습이었으나 내가 본 건 기괴한 창귀의 모습이었어. 목덜미가 덜렁거리며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말이야.”
정국은 아이를 보고서 웃으며 말했지.
“내가 매화 댁을 올 수 있었던 건 그때 범의 춤을 익히고 계시던 태형 형님이었어. 열 하고도 하나의 나이에 나에게 말을 걸어주시던 분은틀림없이 좋은 분이야"
“허나 지금은..”

“지금도 좋은 분이셔. 분명해. 그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그 후로 친해졌어. 웃음기 없던 아이에게 웃음 꽃을 틔워 준 사람이 생겼지.
*
한편 사군자 큰 어른들은 ‘범을 보는 눈'을 가진 자의 등장에 수군거리기 바빴어.
“어찌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리 말씀하신단 말입니까"
“허허.. 미안합니다. 아이가 너무 어렸지 않습니까"
“다른 범무당, 범무녀들은 아이를 인정하지 않을겝니다"
“나도 압니다. 허나 아이가 선택한 길인데다가 능력까지 있으니 어찌 마다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범의 춤은 매화 댁 태형이 알려준다 하셨지요?”
“실력 있는 아이니 곧 모든 이에게 인정 받아 띄어난 범무녀가 될테지요"
이 말을 듣고 있던 국화 댁 장씨가 운을 떼었어.

“..이 사실을 알린다면 다들 반발할겁니다. 그들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으나.. 이것 참..”
“아시다시피 사군자를 대표하는 범무당 중 가장 뛰어나다는 난초 댁 범무당도 범의 춤을 깨우치는데 족히8년이 걸렸습니다. 시간이 더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어째서 범의 춤을 알리려하십니까. 필요없는 능력이지 않습니까"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
매화 댁 송씨의 말에 의해 다른 세 명의 사군자 대표들은 고개를 끄덕였어.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는 것이었지.
“족히300명이나 되는 범무당 무녀들 앞에서 범을 보는 눈을 가진 자라 밝히면 어떻게 될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알다마다요.. 모두가 인정하려 들지 않을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겁니다. 인정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자 사군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수긍하며 알겠다 답했어. 범의 춤을 다 익히면 사군자들 또한 아이를 인정하겠다는 암묵적 표시였지.
“이번에 힘을 키워 산 아래로 내려온 그 범은 난초 댁 박씨가 해결했다지요?”
“하하.. 금새 알아채고 출정해 범의 피를 담아왔더군요.. 고놈도 참.. 말하기로는 한 3년 전에는 산에서만 사람을 잡아먹었다 하더군요.”
“없어진 최씨의 모습을 한 창귀가 나타나 가족들이 많이 울었다합니다.”
사군자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천천히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어. 그로 인해 태형은 더 혹독한 훈련을 해 나갔지.
*
“다시"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팔이 너무 저립니다..”

“네가 선택한 길이다. 못하겠다면 의복을 벗고 지금 당장 매화 댁에서 나가라"
“..어찌 매번 그러십니까..”
“다시 할거면 어서 일어나거라!”
“..매정하십니다"
“이렇게 군다면 더 이상 나도 안 가르치련다"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내쉬던 아이는 태형의 옷자락을 쥐고 울망한 눈으로 올려다 보며 말했어.
“할겁니다.. 가지마세요..”
“징징거리지 말고 일어나라.”
아이가 일어나자 태형은 아이의 의복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말했지.
“아무데서나 앉지 말거라. 의복은 항상 단정하고 깨끗이 해야하지 않겠느냐.”
“훌쩍.. 죄송합니다..”

“조금만 찬 것을 먹어도 배앓이 하는 녀석이 어찌 찬 바닥에 앉으려 해. 고뿔* (감기) 조심하거라.”
*
그렇게8년이 흘렀어. 아이는 벌써 열 일곱의 나이가 되어있었지.
“정국님..!!출정 가십니까?”
“무슨 출정을.. 혹여 범이라도 나온거야?그런 소식은 못 들었는데..”
“그.. 어제부터 어깨가 빠질 듯 아려오는 것이 큰일이 난 게 분명합니다. 꿈자리도 사나웠는데..”
“아.. 그거라면 난초 댁에서 사람을 보내셨다 들었어. 걱정하지 마"
“난초 댁은 재빠르신 분들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런 셈이지. 아 참, 범의 춤을 모두 익혔다 들었어. 축하한다. 고생 많았어"
“태형님께서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 하십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히익..!태형님..”

“어디서 이리 농땡이를 피우나 했더니 공모자가 정국이 너였구나"
어디선가 태형이 나와 정국의 뒷덜미를 콱 잡았어. 정국은 버둥거리며 태형의 팔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지.
“형님 그것이 아니오라..”

“내일 보름달이 뜨면 사군자 어르신들과300명의 범무녀 범무당 앞에서 범의 춤을 선보여야 할터인데 어찌 이리도 한가한게야"
“죄송합니다..”
“벌써 내일입니까?복장을 단정히 해야겠군요. 연화야, 몸에 완전히 익히거라!”
“정국님..!!”
“저 놈을 애타게 불러봤자 훈련에 안 가는 것이 아니다. 저번 달에 준 진검을 가지고 따라오거라"
그 말의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어.
“진검이요?”
“그럼 내일 가서도 목검으로 검무를 펼치지 그러느냐"
“태형님.. 그것이 아니고..”
“그럼 어서 가지고 나오거라"
“네..”
*
매화 댁의 악사들이 두 사람을 따라왔어. 아이는 뒤를 흘깃 거리며 태형에게 속삭이듯 물었지.

“이렇게 숲에서 해야합니까..?
“너는 기가 흘러넘치니 내일을 위해 누를 필요도 있다"
“이곳에 들어오니 머리가 깨질 듯 아픕니다..”

“너의 기를 누르려 산의 기운이 넘치는 곳으로 온 것이다. 내가 말한대로 춤을 추기 시작하면 괜찮을 터이니 불평하지 말고 따라오거라"
“왜 기를 눌러야한단 말입니까..?"
“사군자 어르신 네 분과 300명의 범무당 범무녀들이다. 각자가 가진 기는 어린 아이의 장난질이 아닌데 네가 아무리 센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렇게 해두지 않으면 춤을 추다 죽을지도 모른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내 말이 농 같으냐?”
“아닙니다..!하겠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높은 나무가 가득 둘러싼 곳 중 새하얀 햇빛이 원을 그리고 있는 장소를 찾았어.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그란 공간을 비워둔 채 사방이 나무로 둘어쌓여 있었지.

“우와.. 태형님.. 여기 정말 아름답습니다..”
“감탄은 후에 하고 준비해보거라"
아이는 태형의 말에 의복을 단정히 한 후 칼을 허리 춤에 넣고 춤의 시작을 준비했어. 한쪽 팔은 뒤로 한 채 아이는 눈을 감았어. 반대 팔은곡선을 이루며 비스듬히 뻗고 손 끝은 하늘을 향했지. 아이의 치맛단이 아래로 퍼지고 왼쪽 발은 뒤로 엇갈려 놓자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어.
가야금 소리가 숲 속을 울리고 아이의 팔이 부드럽게 내려가며 빙그르 도니 하얀 치맛자락이 고운 원을 그리며 옆으로 퍼져나갔어.
그렇게 아이의 마지막 준비를 보며 뒷짐을 진 채 저 멀리서 웃음 짓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벌써 이리 시간이 흐른건가.. 여전히 곱구나. 연화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