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의 정석

11 단원. 불변의 진리

범규 시점,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너와 짝이 되었던 그 날이었다.


“ 이번에는 누구랑 짝이냐? ”

“ 김여주 ”

“ 엥 그게 누구야 ”

“ .. 있어. 다른 애들도 잘 모르는 애야 ”

“ 최범규 짝꿍들은 불변의 진리가 있잖아 ”

” 아 무조건 최범규 좋아하는 거? 근데 솔직히 쟤 얼굴이면 그럴만 해 “

” 무슨.. “

” 내기 해볼래? ”

” 뭐? “

” 한 달안에 널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

” 뭐래는거..ㅇ “

” 설마 천하의 최범규가 자신이 없어? “

“ … ”


어릴 때부터 여자들의 관심은 늘 따라오던 것이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도, 동네 아주머니들도,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들도

잘생긴 외모 덕에 여러 특혜들도 받았었다.

만약 내가 이 외모가 아니었어도 그들이 내게 그런 특혜를 베풀었을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특혜를 받는 것이 내게 피해를 주진 않으니 적당히 그냥 웃으며 그 특혜들을 누리고 살았다.

그런 난 누군가에게 져본 경험도 없었고 모두가 날 좋아해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여주 그 얘는 확실히 달랐다.


“ 안녕? ”

“ ㅇ..어? ”

“ 너랑 짝은 처음 해보는 것 같아. 작년에도 못 해본 것 같은데 “

” 아.. 작년에 나랑 같은 반이었어? ”

” 기억 안 나..? “

” ..? ”


정말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어디가서 내가 눈에 띄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였다. 흔히 드라마에서 나오는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의 징조는 늘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것을

점점 더 궁금해졌다. 급식을 다 먹고 무슨 초코우유를 마시는지, 왜 마시는지, 또 무슨 영화를 좋아하고 왜 좋아하는 지

그리고 어째서 날 좋아하는 것 같은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옆에 늘 붙어다니는 최수빈 때문인지 2주가 지나도 날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범규야 내가 그 수빈이 부축 좀 해줘야 될 것 같아 ”

“ 어? 아.. 수빈이 발 다쳤다고 했지? ”

“ 응응! 떡볶이는.. 그 “

” ..? “

” 나랑 주말에 만나서 먹자. 어때? “


처음엔 기분 나빴다. 왜 늘 내가 먼저 약속을 잡고 있지? 이전에 다른 여자애들은 나랑 약속 한 번 잡으려고 안달이었는데

어떻게 넌 자꾸 내가 널 원하게 만드는 것인지 도통 그 방법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

너도 다른 여자아이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기회였다.

그러나,


” 아니..! 사과 안해도 돼! “

” 어..? “

“ 그니까.. 그렇게 막 불편했던 건 아니고 그냥 좀 놀라서.. ”

“ .. 진짜? ”

“ 응..! 진심이야 ”

“ ㅎ.. 다행이네 그래도 ”


니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그 말에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들어왔던 말인데도 전혀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마음 한 쪽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었다.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 감정은 무엇이고 이 느낌은 어째서 느껴지는 것일까

그러면서 난 점점 더 니가 궁금해지고 널 원하게 되었다. 그래 결국엔 내가 먼저, 더 많이 좋아하게 된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려 했다. 내가 너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이유는 지금 이 마음이 아닌 그저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나를 네가 좋아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언젠가 날 용서해줄 수 있을 정도로 니가 날 좋아하게 되면 그때 제대로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 야. 고개 들어 ”

“ 어? ”


퍽,


“ ..!! “

“ .. 쓰레기 같은 놈 “

“ … ”


퍽,


반격을 가하지도 않았다. 최수빈의 말 중 틀린 말은 없었으니까. 난 너의 마음을 기만했고 그 행동은 장난이라는 취급도 못 받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짓이었으니까

그냥 계속해서 맞았다. 이렇게라도 맞아야 좀 내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리고 알았다. 최수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하지만 너의 앞에선 사실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써 자꾸만 날 포장했다. 너에겐 내가 조금이나마 더 다정하고 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 수빈이가 여주 너한테 숨기는 게 생각보다 많더라 ”

” .. 어? “

” 솔직히 나도 싸운 이유는 말해줄 순 없어. 근데.. “

” … “


Gravatar

“ 수빈이를 너무 많이 신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 … ”


아직도 너의 그 표정이 생생하다. 나를 더 믿고 있는 듯 했지만 그 내면 속엔 최수빈과의 아주 두터운 신뢰가 있었다. 18년의 시간은 내가 넘기에 아주 높은 벽이였었다.

괜히 너의 그 표정에 심술이 났다. 그래서 난 더 치밀하게 널 속이기로 했다. 최수빈과의 그 신뢰가 깨지기를 바랬다. 니가 미워서든, 니가 좋아서든

니가 날 더 신뢰하도록 말이다. 최수빈과의 18년보다 나와의 1개월이 더 기억에 남도록

하지만, 이런 나의 계획은 그날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ㅇ.. 여주야.. “

“ .. 나쁜놈 “

“ 어..? ”


너의 얼굴을 보니 난 바로 알 수 있었다. 나의 가면은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을. 더 크고 진짜처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덧붙이다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떨어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가슴 한 쪽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차가워 깨질 것 같았다. 이 또한 내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날 원망하고 미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이때 처음 깨달았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보다 날 미워하는 것이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한 너의 눈빛이 원망 가득한 눈빛일 것 같아서, 예전 같은 눈빛은 아닐테니까

모두가 날 선망의 눈빛, 애정의 눈빛으로 바라봐도 그 사이 너의 원망 어린 눈빛을 보게 되면 정말 다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너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그때면 학교에서 나왔을 시간이었으니까


스윽,


“ ..!! ”


툭,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안겨 우는 듯한 최수빈의 등을 토닥여주는 너였다. 등도, 어깨도 모두 젖어있었지만 넌 오로지 최수빈, 그 아이에게만 집중해 다독여주고 있었다.

머리가 젖어가고 옷이 젖어 몸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고 차가운 공기가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보다 차가운 것은 마음이었다. 내가 한 행동들이 차가운 빗방울로 돌아와 날 적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난 모두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차가워 얼어버린 마음의 무게는 생각보다 더 무거웠기에 난 그냥 주저 앉았다.

불변의 진리 같던 나의 마음은 너라는 변수를 만나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넌 나에게 해결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완전한 변수였다.

그리고 이런 내가 널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일이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한 내가 완전한 널 원하고 찾게 되는 것은 변하지도, 변하게 하지도 못할 사실이었다.

그렇게 처음 느껴본 ‘사랑’이란 감정은 생각보다 더 어렵고 아프고 슬픈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