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의 정석

9 단원. 비가 오는 날엔

” 아니 왜 너네 집 음식 장을 나도 보러가야 돼? “

“ 너도 우리 집 음식을 자주 먹으니까 ”

“ .. 그래도! ”

“ 엄마가 너랑 같이 가랬어. 가서 니가 먹고 싶은 거로 고르래 ”

“ 여사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


상쾌할 뻔 했던 주말 아침부터 최수빈이 우리 집에서 나를 강제로 끌고 나왔다. 자기 심부름 가는데 귀찮아서 끌고 온 줄 알았더니 여사님의 큰 그림이셨다.


” 그리고 영화 사준다고 했잖아 “

” 뭐 볼건데? “

” 몰라? 요새 뭐 나오고 있지? ”

“ 요새 재개봉 많이 하더라 ”

“ 음.. 아 그 짱구 보러 갈래? ”
 
“ 너 천재야? ”

“ 짱구 하나 개봉한 것 같던데 “

“ 아 근데 나 그거 이미 봤어 “


사실 전에 범규랑 영화관 왔을 때 봤던 게 그 짱구다. 아니 범규도 짱구 안다고 하고 본인은 상관 없다고 해서 전부터 보고 싶었던 거 골랐는데.. 음


” 언제? 혼자? “

” 아니? 범..규랑..? “


아뿔싸.. 최수빈 앞에서는 최대한 범규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미쳤지 그냥 거짓말 칠 걸..


” 허.. 그때? 너 놀러 갔던 날? “

” 어..응 “

“ 그럼 그건 탈락. ”

“ … “


아쉬웠다. 그거 진짜 재밌었는데 물론 나만 재밌게 봤던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매표소에 가니 짱구라는 그 두 글자가 계속 아른거렸다. 옆을 보니 아이들이 짱구 흉내를 내며 깔깔 웃고 있었다.

부러운 자식들.. 짱구를 보고 왔나보다..


그때,


“ 짱구.. 보고 싶어? “

“ 응.. 어? “

” 참.. 짱구는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래 “

” 그냥.. 다 매력적이지.. 아니야! 안 봐도 돼 “

” 웃기지마. 아까부터 너 저기 애기들 보고 있었잖아 “

” .. 들켰네 “

“ 그럼 짱구 보자 ”

“ 그래도 돼..? ”

“ 너 사주려고 온 거니까. 니가 보고 싶은 거 봐야지 ”

“ 수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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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지금 짱구 하나에 최수빈에서 수빈이가 된거야? 나? “

” ㅎㅎ.. “

“ 치.. ㅎ 예매하고 있을테니까 넌 가서 팝콘 사와 ”

“ 옙! ”


그렇게 난 신이 난 마음을 안고 매점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최수빈이 천사처럼 보였다.

팝콘과 콜라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대기의자에 앉아있는 최수빈은 뭘 보는건지 되게 진지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 어디를 보는거야.. “


그때,

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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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여주야! “

” 범규..? “

” 영화 보러왔어? “

” 응응! 너도? “


내 뒤에서 꽤 익숙한 냄새가 나길래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려했는데 범규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 친구들이랑 보러 왔어. 너는? “

” 난 최수.. 아니 나도 친구랑 ”


범규한테도 최수빈 얘기는 안 꺼내는 게 좋겠지..


“ 뭐 보려고? “

” 나 짱구! 저번에 봤던 거 “

” 아~ 그때 봤던 거? 재밌었지 “

” ㅎ 그치?! “


그때,


“ 어? 뭐야 얘 설마.. ”

“ ..? ”

“ 아 내 친구들이야 ”

“ 아.. “

“ 쟤가 그때 걔 아니야? ”

” 어..? “

” 니가 저번에 우리랑.. “

” 여주가 낮을 많이 가려..! 그치 여주야? “

” 어? 아.. 응 “


그때,


” 주문하신 팝콘이랑 콜라 나왔습니다 “

” 네..! “


스윽,


” 영화 재밌게 보고 학교에서 보자 “

” 어? 아 응! “


뭔가 수상했다. 쟤네가 날 왜 알고 있지..? 그리고 범규랑 쟤네가 뭐 어쨌다는거야..? 그걸 성급히 막는 범규도 수상하고

미심쩍었지만 또 늦게 가면 최수빈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애써 무시하고 대기 의자로 향했다.


” 매점에도 줄 기네 ”

“ 오늘따라 사람들이 유독 더 많은 것 같아 “

” 아까 얘기하던 애들은 누구야? “

” 어..? 아 그게.. “

” ..? “

” 친구들! 너 모르는 친구들 “


에이씨 망했다. 내 친구들 중에 최수빈이 모를 친구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최연준도 최수빈이 알고 내 친구=최수빈 친구라는 공식이 존재하기에

거짓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치고 말았다.


” .. 김여주 “

” 어..? “

” 일부러 내 앞에서 최범규 얘기 안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

” ㅇ..응? 아 범규 진짜 아니..ㅇ “

” 애초에 내가 모르는 니 친구가 있을리가 없잖아 “

” … “

” 나랑 있을때는 그냥 맘 편히 해. 괜히 애쓰지 않아도 돼 “

” .. 알았어 ”

“ 최범규도 영화 보러 왔나보네 ”

“ 응. 친구들이랑 왔더라고 ”

“ 친구들..? 설마.. “

” 왜? 너 뭐 아는 거 있어? “

” .. 무슨 말 들은 건 없지? 걔네한테? “

” 응. 근데.. “

” ..? “

” 걔네가 뭘 얘기하려고 했는데 범규가 급하게 막았어 “

” .. 그래? ”

“ 왜? 뭐 있어? ”

“ 아니야. 별거 없어 “

” 아 왜? 뭔데? “

” 쓰읍 - 최범규 얘기 그만 “

” .. 치 “

“ 어어~? 짱구 취소해? 그냥 히어로 봐? ”

“ 아..!! 미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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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보니 짱구가 아주 천하무적이야~? “

“ .. 최수빈놈 진짜 ”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최수빈이 갑이잖아. 을로써 어쩔 수 없는거야.. 짱구를 지킬 수 있다면 이정도 킹받음이야.. 버틸 수 있다

아니 근데 진짜 킹 받는다.


잠시 후,


“ 짱구는 못 말려 입장 하실게요~ ”

“ 들어가자! ”


그렇게 우린 함께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고 여러 광고들이 지난 후 영화가 시작되었다. 여러 번 봐도 귀여운 짱구의 모습에 진짜 다시 한 번 평짱을 다짐했다.

옆에 최수빈을 보니 꽤 재밌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최수빈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했다. 최수빈도 기다릴 겸 난 옆에 있던 인형뽑기 기계를 돌리고 있었고 자꾸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갔다.


그때,


“ 아 최범규 얘는 대체 언제 나와.. ”

“ 어..? 쟤네.. ”


옆 계단을 보니 아까 그 범규 친구들이 있었고 보아하니 범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범규는 자기랑 되게 다른 외관의 친구들을 만나는구나..

범규는 저 사이에 있으면 완전 천사 아닌가

괜히 엮이면 머리 아파질 것 같은 친구들의 모습에 그냥 혼자 인형뽑기를 계속했다.


스윽,


“ 오..!! 뽑았다!! ”

“ 근데 아까 그 여자얘 걔 맞지? ”

“ 맞다니까 ”

“ 나..? ”


그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뭐야.. 나 또 뒷담 들어..? 잘 들리지 않아 난 꽤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도 궁금은 하니까..


스윽,


“ 맞다니까. 저번에 우리랑 내기 걸었던 걔 맞잖아 ”

“ 내기..? ”

“ 며칠 남았냐? 한 일주일 남았나? ”

“ 그럴 걸? 한 달이었으니까 ”

“ ..?!! “

“ 그 얼굴인데 한 달씩이나 걸리는 거면 여자얘가 이상한 거 아니냐? “

”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


탁,

그 아이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애초에 범규가 내게 먼저 다가온 이유도 그저 돈을 건 내기 때문이었고

내게 아주 잘해주었던 이유는 한 달이란 시간 때문이었다. 순간 너무 충격적인 내용들에 저 이야기가 사실인가 싶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그 모습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건 내 마음도 부정당하는 거니까

최수빈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좋아했던 그 마음이 부정당하는 거니까


그때,


“ 여주? 여기서 뭐..ㅎ ”


스윽,

탁,


“ ㅇ.. 여주야.. “

“ .. 나쁜놈 “

“ 어..? ”


주르륵,


“ 진짜.. 왜 미워지지도 않아.. 왜 “

” 대체 왜 그래? 어? 이유를 말해..ㅂ “

” 일주일 밖에 안 남아서 참 급했겠다.. 그치? “

” ..!! 설마.. “

” 너 같이 잘생긴 얼굴에 호감을 못 느끼는 내가 이상한 얘 같아. “

” 여주야.. 그건 “

” 니가 지금 말하려는 게 이유던 변명이던 안 들을래 ”


저 이유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듣게 되면 내가 다시 널 좋아하게 될까봐, 아니 지금 이 마음을 버리지 못할 것 같아서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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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여주 이제 가..ㅈ 뭐야 ”

“ 최수빈..? ”

“ .. 가자. 얼른 ”


탁,


“ .. 너 울었어? ”

“ .. 그냥 빨리 가자고 ”

“ 김여주. 나 봐 ”

“ 아 빨리 가자..ㄱ ”

“ 나보라고. ”

“ ..!! “

“ 쟤가 울린 거 맞아? “

” … “

” .. 하 “


그때 갑자기 최수빈은 범규에게 다가가더니,

퍽,


” ..!! “

” .. 멍청하면 노력이라도 했었어야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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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의, 그거 하나조차 없는 놈이였네 “


그 말을 뒤로 최수빈은 나를 끌고 영화관을 나왔다.

적잖이 충격이었다. 최수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거야..? 근데 왜 말을 안했지..?

그냥 모든게 충격이었다. 순간 쌓여있던 모래성이 모두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결국 난 최수빈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 .. 그렇게 된거래 “


생각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럼 그때 싸운 이유도 이걸 안 최수빈이 범규를 때린건가


“ 그럼 그때 둘이 싸운 이유가.. ”

“ .. 그때 듣고 화나서 그만.. ”

“ 알고 있었으면서.. ”

“ 어..? “

“ 왜 말 안 했어..? 왜..? ”

“ .. 그게 ”

“ 말해줬으면 내가 그딴 고민 안했어도 됐잖아.. 그딴 얘기 안 들었어도.. ”


지난 날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미안해했던 내가 참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 모든 고민들은 이 이야기 하나로 그저 내 쓸데없는 망상이 되어버렸으니까


“ 대체 왜..! ”

“ .. 니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보였으니까 “

” 뭐..? “

” 말로는 최범규보다 가까이 가겠다고 했지만.. 알고 있었어. 니가 최범규를 얼마나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는지 “

” … “

” 나도 느낄 정도 같았어. 근데 내가 어떻게.. “

” … “

”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 얘기를 해.. “

“ 너.. ”

“ 그 얘기 들으면 니가 슬퍼할 거 뻔히 아는데 내가 그 얘기를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바로 말할 수 있겠냐고 “

” … “

“ ..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

“ .. 하 ”


비가 내렸다. 소나기일지 아니면 기다란 장마의 시작일지 아무도 모를 비가 내렸다. 생각보다 더 차가운 빗방울들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움츠러 들었다.

지금껏 맞아온 비들보다 훨씬 차가운 비였다. 이 비가 과연 금방 그칠 수 있을까

그냥 얼른 지나갈 소나기였으면 좋겠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갈 그런 소나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