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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바치는 마지막 편지_
글 : 레모네
친애하는 공작님,
제가 없는 그곳은 오늘도 안녕한가요? 공작님을 떠나보낸지 어언 5년이 다 흘렀어요.
소녀는 5년이란 시간동안 공작님을 하염없이 기다리옵고, 단지 저 없는 그 편안한 세상에 계시며 소녀를 잊으신 건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에요.
오늘 이곳 '킬로베르크' 에선 봄비가 아릿땁게도 내렸어요, 공작님. 비에 예쁘게 젖은 제국의 꽃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왕궁의 모두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하나 같이 모두가 궁에서 나와 꽃구경을 했답니다. 물론 소녀도 신이나 구경을 갔었죠.

왕궁의 뒷 정원 들판에는 노란바다가 봄을 반기는 듯이 활짝 피어있어요. 공작님께서 가시고 2년 쯤 뒤였을까요? 노란 유채꽃 씨앗을 심기 시작했거든요. 공작님도 저 아름다운 광경을 직접 보시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공작님께서 계시지 않는 이곳 킬로베르크는 지금 저 여유로워 보이는 꽃들과는 상반되어있는 추세에 이르렀어요... 아니, 정확히는 공작님께서 전쟁에서 돌아오시지 못하고 계실 때부터 였어요. 5년간 아주 천천히 백작들의 세력이 확장되었고 곧, 왕궁을 장악하려 할 거 같아요...
공작님께 바치는 이 작은 편지에선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지만, 그럼에도 소녀가 공작님께 이와 같은 내용을 아뢰옵고 있다는 건 뭔가 연유가 있음을, 공작님은 눈치채셨을 거라 믿어요.
소녀는 공작님의 마음이 불편하신 게 싫어요. 다만 이 편지가 공작님께 바치는 마지막 편지이기에 이리 슬픈 마음 부여잡고 한 자 한 자를 써내려가요.

공작님께서 늘 제게 말씀하셨죠. 여인이라하여 왕궁을 다스릴 수 없는 게 아니라고, 당당히 그 위세를 스스로 높여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공작님이 옆에 계시기에 할 수 있었던 거 였어요... 그땐 아무리 제가 떵떵거리고 어깨를 펴고 다녀도 누구하나 감히 저를 건드리지 않았기에 그게 제 권력인줄로만 착각했나봐요...
공작님이 제 곁에 계시지 않으니, 저는 당당히 걸어다니지도, 쉬이 말을 꺼내서도 안되는 그런 존재임을 자연스레 깨달았어요.
아마, 공작님께서 지금의 저를 마주하게 된다면 엄청나게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어요.
공작님, 저는 이만 이 편지를 곧 마무리하게 된다면 다시는 공작님을 추억하지 않기로 다짐했어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줘요. 모두가 공작님을 포기하고 놓아버렸을 지금, 저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킬로베르크 제국의 황녀
프레야드 베르리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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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 어서 주무셔요!"
"응 방금 막 다 썼어, 슈로(황녀의 최측근 궁녀)"
"...오늘도 우셨어요, 황녀님?"
"아니, 오늘은 안 울었어.
마지막이잖아"
"...잘 선택하셨어요, 추억도 계속하면 상처가 되니까요."
"...응 이젠 정말 놓을 때가 된 거 같아"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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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잠자리에 들자,
그리고 내일도 봄구경을 가자.
그게 아무 생각을 안 하기에는 제격이니."
"네 황녀님!"
투둑투둑 내리는 그 봄비의 소리는 밝은 저 달이 동에서 서쪽으로 지나가는 그 긴 시간을 꾹꾹 채워 넣어주었다. 마치 다음 날 제국을 비추어줄 따스한 해를 반기기 위한 여느 노랫소리의 반주처럼 말이다.
그 싱그럽던 반주가 끝이 날 때는 어두운 밤이 다 가고
나서였고, 새들은 또 다시 초봄을 알리려 힘을 다해 지저귀며 아침을 반겼다. 그날따라 정원의 풀잎들에 맺힌 보슬스런 이슬방울은 제국의 백성 모두에게 유일히 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전해주기에 아주 적합했다.
"황녀님, 오늘따라 하늘이 참 맑네요!"
"그러게... 봄비가 간밤에 좋은 선물을 놓고 가주었구나"
"어쩜... 저기 저 참새들은 노래하는 것 같지 않나요?"
"참새들 뿐이더냐, 그 아래 살랑이는 저 수선화도
마치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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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참! 황녀님, 오늘 드레스는 어떤 색으로 준비할까요?"
"음... 글쎄,
오늘은 하늘이 유달리 맑으니 저 푸른색을 따라
입어볼까?"
"네! 좋아요! 서둘러 준비할게요!"
잠시 고요하고도 시끄럽던 그 짧은 시간이 지나니 여러 궁녀들을 이끌고 처소로 걸어들어오는 슈로. 뒤에 조금 보이는 아름답고도 화려한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정말 하늘에서 따온 색 마냥 아주 푸르르게도 빛나고 있었고, 살랑이는 레이스 한 단 한 단이 살아 숨쉬는 것만 같았다.
그 드레스로 천천히 환복을 마친 프레야드 베르리시는
그야말로 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다름없는 자태였다.
"어머나... 황녀님..."

"...예뻐?"
"그럼요 황녀님! 정말 잘 어울리세요!"
"말이라도 고마워, 슈로"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담은 드레스를 입고 나가는 프레야드 베르리시는 누가 봐도 봄에 아주 적합하고 어울리는 착장이었을 것이다. 선뜻 감탄을 금치 못할 황녀이지만, 왕궁에서의 그녀는 그런 환대를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그럭저럭 5년동안 곧잘 참아왔기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야외의 싱그런 공기를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던 그녀는 슬며시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아, 오늘도 여전히 봄이구나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한 걸음, 두 걸음을 갔었을까
누군가 그녀를 아주 급하고도 애타게 불렀다. 그녀는 그 부름에 뒤를 돌았고, 봄바람은 여지없이 살랑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 새그랍던 어젯밤의 봄비가 남기고 간 것은, 기분좋은 이 바람이 등에 이고 오는 것의 의미를 말이다.
"황녀님!!!"
"...?"
"지... 지금 공작님께서!"
.
.
.

"...오랜만이에요,
못본새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황녀님"
왜였을까, 그녀는 해맑은 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꽃들이 수북한 그 정원에 힘없이 주저앉았고, 흐르는 눈물이 멈출새가 없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까.
"... 왜... 왜 이제서야..."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죠..."
"... 보고싶었어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구요..."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그만큼 보고싶었어요, 벨리."
"......"
"다시는... 다시는 벨리 곁을 비우지 않을게요..."

"제 심장을 걸고, 맹세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