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과 현실 언저리

미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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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 마라
: 감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은 대개 특정 시기에 짧게 피었다 지는 꽃들을 아름답다고 한다. 한철 피었다 흩날리는 벚꽃이나 어느 순간 잔향만 남긴 채 사라지는 라일락 같은. 나는 저들과 같은 사랑을 해본 적 있다. 열여덟 무렵, 하필 지독한 첫사랑으로 찾아왔던 그는 꽃잎이 떨어지면 곧 피었던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벚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들어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잔향에 코끝을 시리게 만들던 라일락에 가까웠지. 소싯적 고등학생 애새끼의 사랑이 뭐 그리 애틋하고 구체적인지 피식 웃음이 나온다. 고백도 한번 못 해보고 끝난 첫사랑이 뭐 예쁘다고. 몇 날 며칠 서럽게 울어대던 날들의 기억에도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애틋한 마음만 앞서는 내가 퍽 웃겼다. 나는 누구에게나 응어리진 첫사랑의 형태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모두의 첫사랑은 잊히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 아씨, 또 생각했어.”





내가 그 애를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두가 겪는 첫사랑 후유증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연락마저 뚝 끊긴지 벌써 5년도 더 지난 지금, 이십 대 중반이 된 우리가 다시 마주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으니.










미워하지 마라
: 감히 미워할 수 없는










“너… 뭐야? 네가 왜 내 앞에 있어?“

“……“

”아니 그것보다 최연준 너 맞아…?“





평소처럼 끝까지 앉아 술이나 들이키지 불편하다고 먼저 나온 나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기가 올라오든 속이 뒤집히든 그냥 꾹 참는 건데. 친구들과 그 사이에 섞인 남자들의 더러운 눈빛이 꼭 벌레가 살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었다. 역겨워 토악질이 나오는 걸 겨우 참고 가방을 챙겨 급하게 술집을 나왔건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는 단지 길을 걷다 잠시 눈을 감고 적당히 기분 좋은 알딸딸함을 느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라일락 향기가 훅 파고들었다. 미간을 구기며 눈을 뜬 순간, 거짓말 같게도 그새 많이 커진 네가 내 앞에 있었다.

사실 바로 알아본 게 놀라울 격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연준의 모습은 분명 열여덟에서 열아홉 그쯤이다. 성인이 되고 난 후의 모습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두 눈이 커진 이유는 현재 그의 모습이 고등학생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였다. 최연준은 고등학생 때보다 키가 조금 더 컸고 젖살이 빠져 턱 선이 날렵해졌다. 아, 전체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것 같은데. 어느샌가 나는 이십 대 중반의 최연준을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기분이 참 묘하다. 확률 제로에 가까운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어서 그런가.





“나 아니면 누구게. 많이 놀랐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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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너무 오랜만이다.“





최연준이 웃는다. 내가 미치게 좋아했던 웃는 모습이 당장 내 앞에 서있는 그와 겹쳐 보였다. 한껏 접힌 두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 잔뜩 올라간 입꼬리까지. 성인이 돼도 웃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다. 코가 시리고 심장 부근이 아릿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에 나는 고개를 한 번 천천히 들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뒀다. 최연준이 사라진 뒤 홀로 자주 하던 상상이 꼭 지금과 같다. 언젠가 서로를 마주한다면 어떨지, 그땐 내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은. 그때마다 나는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상황을 그렸다. 상상 속 나는 한 번은 모른 척 지나갔고, 한 번은 원망했고, 또 한 번은 웃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 중 지금과 같은 건 없었다. 조금 취했기 때문일까?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쏟았다.





“너 뭐야. 진짜 뭔데!“

“너야말로 왜 울어.“

“몰라… 그냥, 그냥 좀 이상해.“

“넌 정말 여전하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느낌상 최연준이 틀림없다.





“스물여섯이나 먹고도 길바닥에서 울고 싶냐.“

“다 누구 때문인데…”

“허, 또 나라고?”





당연하지. 내가 저 아니면 울 일이 뭐 있다고. 또라고 묻는 걸 보니 최연준 역시 그 일을 기억하나 보다. 사실 내가 그 앞에서 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 7년 전쯤인가? 열여덟의 나도 지금처럼 길에 주저앉아 울었다. 이유는 최연준이다. 좀 슬프지만 최연준의 첫사랑은 내가 아니었거든. 뭐, 나한테나 첫사랑이지 걔한테 나는 아닐 수 있으니까. 지금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이해할 수 있으나 모든 게 처음이었던 고등학생 애는 아니었던 거다. 마침 하굣길에 최연준과 부딪혔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는 그걸 핑계 삼아 엄청 서럽게 울었다. 그때도 너는 나를 달랬는데 오늘도 그렇네. 흐르던 눈물들은 닦인지 오래, 눈가만 시뻘게져서는 옅게 웃어버리면 너는 내게 손을 내민다. 최연준의 손은 여전히 크고 따뜻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함에 다시 한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우리 잠깐 걷자. 못다 한 얘기들도 할 겸.“

“… 그래.”





걷기를 원한 쪽은 최연준이었다. 정작 말을 많이 늘어놓은 건 나였지만. 우리는 조금 느리다 싶은 속도로 난 길을 따라 걸었고, 이야깃거리는 끊길 틈이 없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로 시작해 잘 지냈어? 그리고 이때 기억나?까지. 매일 걸어 시시한 길이 분명했다. 봄이라는 걸 티 내는 듯 잔뜩 핀 꽃과 풀, 듬성듬성 박힌 가로등, 지나다니는 몇몇 사람들. 어제와 달라진 거 없는 길이 최연준 하나 있다고 특별하다. 어쩌면 나는 이 특별함을 여전히 사랑하는 걸지도… 열심히 움직이던 발이 멈춘 건 길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즘이었다. 머리 위로 가로등 하나가 빛을 내고 바람이 적절하게 불어왔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미묘한 표정의 최연준이 보인다.





“너 여기 왜 왔어?“

“음, 그냥?“

“… 미국에서 여기까지?“

“응.”

“너도 참 이상한 놈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누가 미국에서 한국을 그냥 오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자 최연준은 홱 뒤를 돌아 내 앞에 선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지? 편하게 말하라고 내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면





“그때 나 네 연락 엄청 기다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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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너 되게 나쁘더라, 어떻게 읽기만 하고 답장 한 번을 안 해.“





어느새 진지해진 최연준이다.





“이유가 뭐였어?“





바로 알 수 있었다. 최연준이 언급하고 있는 날이 언제인지. 나는 허공을 응시하다 어느 순간 입술을 짓이겼다.

최연준이 그랬다. 어릴 때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게 됐는데 십 대 전부를 미국에서 보내긴 싫었다고. 고등학교 만이라도 한국에서 다니고자 최연준은 열일곱 봄 혼자 한국에 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열아홉 가을엔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최연준은 떠나기 전 내게 카톡을 보냈었으니까. 나 내일 미국 가. 한국 또 언제 올지 모르겠어. 최연준이 말하는 연락이 바로 이거다. 그의 말대로 카톡을 읽기만 하고 답장을 안 한 건 나였다. 변명이라도 해보자면 아무렇지 않은 척 잘 가라고 하기엔 눈물샘이 멈추지 않았고, 가지 말라고 잡기엔 이미 정해진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고백하자니 겁은 또 더럽게 많아서. 나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뒤로 연락이 아예 끊겨버릴 줄 알았더라면.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그러지 않았을 거다. 적어도 한 번은 마음을 뱉어봤겠지. 그랬으면 지금처럼 첫사랑 후유증을 평생 앓는 일 따윈 없었을 테니까. 정작 최연준 말에 대답은 못하고 쓴웃음만 얼굴에 자리 잡는다.





“… 미안.”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업보였다.





“아니, 그거 말고.“

“……“

“… 진짜 바보 같네.”





어쩌면 최연준은 다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과 이 때문에 답장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이제는 최연준이 본인의 입술을 짓이긴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신호였다. 나는 모든 것이 내 업보이니 더 이상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욕심은 없다. 우리가 제로에 가까운 확률로 다시 만났다고 해도 최연준은 어차피 또 사라질 인간이기에. 나는 미성숙했던 시기와 같은 선택을 한다. 나는 너를 좋아했다. 또 여전히 좋아한다. 아마 오늘이 지나간 후에는 네가 더 좋아질 지도, 어쩌면 오늘을 많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어, 첫사랑 앞에 겁내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걸.





“… 내가 오늘 술을 좀 마셔서. 한국에 지낼 곳은 있지?“

“어.”

”오랜만에 봐서 좋았고 잘 지내다가 미국 들어가. 반가웠어. 진심이야.“





여태 최연준과 얘기하면서 제대로 전한 건 딱 이 몇 마디뿐이었다. 전하지 못한 진심은 고이 접어두면 언젠가 잊힐 거라는 나의 오만한 생각과 함께 입꼬리를 말아올린 다음, 최연준 앞에 한 손을 내민다.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이자 용기였고 끝이었다.

최연준은 그런 내 손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절대 잡지 않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 역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의 시선이 손에서 어깨, 턱, 코를 지나 올라오고 끝내 두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의 눈이 슬퍼 보여서? 너무 많은 감정을 눈에 담고 있어서? 답을 내릴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다.

그러다 갑자기 튀어나온 최연준의 말에 내밀었던 손은 제자리를 찾고 눈은 몇 시간 전 마냥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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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한테 거짓말했는데.“

“어?“

”누가 미국에서 한국까지 그냥 와, 그것도 비행기만 열네 시간 타고.“

”그치?! 아까 듣고 되게 이상했어 너.“

”안 궁금해?“

”궁금해하면 말해주긴 할 거고?”

“보고 싶어서,“





무슨 말인가 싶어 두 눈을 느리게 끔뻑이면 최연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춘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야 되는데 잊히긴커녕 더 생각나서 왔어.“





미간이 점점 구겨진다. 그러니까 지금 최연준이 비행기 열네 시간을 타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나 때문이다…? 에이, 말도 안 돼. 최연준은 아무래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한테 저런 말을… 아, 설마 최연준이… 아니 근데 나를 대상으로? 백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엔 단순히 정인 줄 알았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해. 분명 너한테 서운하거나 미운 마음이 먼저 들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야.“

“야,”

“과장 조금 보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어봤다고 쳐. 다들 상사병이래, 나.“

“네가? 나 때문에? 아니, 대체 왜…!“

“글쎄,“





최연준이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핀다.





“나도 모르게 좋아했나 보지.“

“……”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째선지 나오지 않는다.

최연준은 어쩔 줄 몰라 눈도 못 마주치는 나를 보며 픽 웃었다. 하긴 고백은 저가 했는데 호들갑은 내가 떠니 웃길 만도. 나는 조심스레 최연준을 훑었다. 아까보다 붉어진 귀와 가만있지 못하는 손을 그제야 발견하니 깨닫는다. 아, 얘 진심이구나. 어느 순간 귓가에 내 심장소리만 들리기 시작한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심장 소리에 몸이 굳어버리고, 혹시나 최연준에게 들릴까 심장 부근 옷자락을 꽉 쥐었다. 망했다. 이제 와 뭘 해보려는 욕심은 추호도 없었는데…





“또 여전히 그렇고.“

“……”

”다 지나서 이러는 거 되게 멋없는 거 아는데,“





최연준의 눈에 오로지 내가 담긴다.





“내가 널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귀가 붉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목마저 벌겋게 달아오른 최연준을 앞으로도 쭉 보고 싶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듣는 그의 고백이 미치도록 달콤하다. 정말 너무나도 달콤해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너 내일 못난이 되겠다.“

“… 아니거든.“





또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생각은 않고 얼굴을 뒤덮는다.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벅차오른 건 확실하다.





“왜 자꾸 울어-. 나 그냥 미국으로 다시 가버릴까?“

“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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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고, 나 이제 미국 안 가. 대학 졸업도 했겠다 네 옆에 붙어있을 예정.“





미국에 가버린다는 말에 한 번 울컥. 이어지는 내 옆에 있겠다는 말에 또 울컥. 떨어진 눈물방울이 뺨을 따라 흐르면 최연준은 자기 엄지손가락으로 하나 둘 닦아낸다. 그러고선 내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 맞추더니 마지막엔 나를 향해 예쁘게 웃어버린 그였다. 나는 그런 최연준이 얄미워 괜히 투덜대다 금방 나를 안아버리는 최연준에 숨을 헙 참았다 내쉰다.





“너, 진짜 짜증나…”





말은 그래도 얌전히 최연준 품에 안긴 상태였다. 내가 최연준 품에 더 파고들면 최연준 역시 나를 더 꽉 안는다. 조금은 숨이 막힐 듯,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았다.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지고 번진 웃음은 꽤 긴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미련하고 바보 같던 나의 첫사랑은 해피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