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의 연인

그 남자는 장산범이었다

누구나 인생의 변환점, 즉 터닝포인트가 생기는 
때가 있을것이다. 나에게는 아마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그 해가 터닝포인트였을 것이다. 
암흑 그 자체던 내 인생에도 볕들 날이 온다는걸 
알았으니까. 

무당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어릴적부터 
귀신을 볼수 있었다. 그걸 영안이라 했었나. 
이 탓에 집안 어른들에게 한동안 노파심 섞인,
동정어린 시선을 받아야했다. 

게다가 귀신을 본다는 사실을 들킨 후로 사람들은  
날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서서히 고립되었다. 
차라리 무시한다면 낫지만, 개중에 악독한 놈들은 
괴롭히기도 한다. 





내 책상 위에 조악하게 만들어진 부적과
저급한 욕이 쓰여진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등 뒤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린다. 

"박하야, 우리 선물어때? 마음에 들어?" 

"네 귀신들한테 얘기좀 해줘 선물이라고." 

거슬릴 정도로 즐거워보이는 미소. 지겹다. 
나는 포스트잇을 모두 떼어내고 의자를 당겨 
앉았.. 

"!!!"

...설마 의자에 압정을 깔아뒀을 줄이야. 휴, 
엉덩이 찔릴뻔했네. 

"어머!! 아깝다." 

"등받이에 붙일걸." 

애써 비열한 얼굴을 외면했다. 째려볼 용기도 
없으니까. 





오늘은 준수하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또 
일이 터졌다. 체육시간에 쓸 배구공을 가져오란 
말에 서둘러서 창고로 향했을 때였다. 
뜀뜰 사이로 보이는 배구공들을 품에 안고 
나가려는데. 

"야야 빨리닫어." 

창고 문이 잠겨버리는게 아닌가. 
그제야 날 가두려고 창고로 유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이거 열어!!" 

"거기 잠깐 있어봐 이따가 열어줄게~" 

자기들끼리 조잘대는 소리가 멀어졌다. 
이거 꼼짝없이 갇혔네. 어떻게 나가지? 

"아니! 저런 고약한 놈들을 봤나." 

"???"

뜬금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대에 안맞는 붉은색 한복과 호랑이같은
앞발을 가진 남자가 뜀틀에 앉아있었다. 
서, 설마 귀신?

"내가 보이는가?!" 

그 남자가 도리어 반색하며 놀라워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뜀틀을 훌쩍 뛰어내린 남자는 신기한듯 나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넌 이름이 뭐냐." 

"서박하.." 

"박하?? 이름이 특이하네." 

싱글벙글하던 그가 불쑥 한 손을 내밀었다. 
흰색 털이 북슬북슬한 호랑이 발을. 
큼, 참 발톱이 무시무시하군. 

"아유~ 나를 알아본 인간은 오랜만이구만. 
 나는 최범규라고 하네. 300년 된 장산범이지!" 

장산...? 그건 그렇고 방금 사극 말투 쓴거 맞지?
영 적응 안되는 외양과 말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그나저나 여기 갇히게되서 어쩐담." 

"난 창문으로라도 나가..." 

"어허!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구." 

그 장산범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더니 발톱으로 
문 틈새를 찌른다. 

"자물쇠를 잠궈뒀군. 이런 약한거야 부수면 
 그만이지." 

발톱을 튕기니 자물쇠가 가벼이 부서졌다. 
범규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자 어서 나가보세." 

"앗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가끔 나 좀 찾아와주게. 
 요새 심심해서 말이야!" 

호탕하게 웃어보인 그는 내가 시선을 거둔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진짜 귀신에 홀린 기분이군.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