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_ 나쁜 거라 더 끌리는 거야
번쩍.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이불, 그리고 안 익숙한 내 옆에 잠든 김석진. 어제는 정말 내 수명이 10년은 단축 된 것 같은 날이었다. 그런데 나
이제 김석진 어떻게 대해야하지?.. 미래가 캄캄했다.
" 김석진. 일어나. "

" ...... "
그는 내 목소리에 눈을 뜨고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쟤는 뭐가 그렇게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거야? 자존심 상하게. 어떻게 서로 세컨드임을 알고 있음에도 저렇게 태평할 수가 있지? 수만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딱히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존심 빼면 시체인 사람이니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대충 주섬주섬 입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을 뭐로 해야 하나 고민 하던 중, 안방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거 김석진 벨소리인데... 얘 지금 씻고 있는데? 어떡하지? ... 뭘 어쩌긴 어쩌겠어. 알려줘야지.
난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철컥. 그냥 망설임 없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 ....... 야 김석진, 전화 오는데. "
씨발. 뭐야 샤워 중이었어? 지금 나는 존나 당황스러워서 돌아가실 뻔했지만 일단 태연한 척 했다. 김석진은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하긴 샤워 중에 갑자기 문 열리면 저럴만도 하지.........
" 놔둬. 나가서 받을게. 그리고 노크 좀 해라. "
응 어쩔티비~ 라고 속마음으로 외치고 입으로는 응 미안. 이라고 대답했다.
뭐어때 어젯밤에도 봤는데? 남도 아니고 남자친구잖아 비록 세컨이라도.. 라고 수천번 되뇌었다. 적어도 김석진한텐 미안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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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끝마친 석진이 머리를 탈탈 털며 나왔다. 그는 곧바로 안방으로 가서 자신의 전화기를 찾아서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아.. 저 표정을 보아하니 퍼스트한테서 온 전화인가보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퍼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미안 어제 저녁엔 좀 바빠서.. 오늘 만나자. 응 끊어~ 사랑해. "
하하. 여친 앞에서 여친 전화를 받는 이 장면.. 정말 남이 보면 헐리우드 마인드라고 감탄을 하고 갈 것이다. 이건 둘째치고, 난 지금 저 채희라는 사람이 너무 궁금했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이름, 한채희. 나이는 연하라는 사실밖에 모른다.
석진은 전화를 끝마치고 식탁에 앉았다. 간단하게 만든 간장계란밥이 나름 입맛에 맞았던건지 잘 먹었다. 솔직히 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내 신경은 온통 그의 퍼스트를 향해있었으니까.
..........에라모르겠다. 자존심이고 뭐고 일단 내 궁금증은 풀어야겠어.
" ... 나도 채희씨 궁금한데.. 너도 내 퍼스트 봤는데, 니 퍼스트 좀 보여줘라. "

" 상관은 없지. 한채희 어짜피 질투 별로 없어. "
세상에 질투 없는 여자가 어딨냐? 저건 진짜 개바보새끼였다. 여자 마음도 모르고 어떻게 두여자나 만나고 있을까? 아 얼굴.... 씨발 그래 잘생긴게 최고다. 속마음으로만 중얼중얼 욕하고 겉으로는 고개만 끄떡거렸다. 쟤 연애사에 관심을 별로 없으니까.
" 응. 그럼 그냥 대충 입만 맞추자. 회사 동료 정도로. "
"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너 연기 잘하잖아. "
" 내가? 몰랐네. "
" 연기 못했으면 어떻게 나 모르게 바람을 피우겠어. "
" ... 야 김석진. 니가 할말이야? "
이게 무슨 도토리 키재기인가.... 바람둥이 둘이서 연기를 대화 주제로 삼는 거 부터 웃겼다. 도긴개긴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나보다. 의미 없는 대화를 하다보니 어느새 밥 한공기를 뚝딱 했다. 이제 채희씨 만날 준비나 해야겠다.
식탁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내 휴대전화에도 전화가 왔다. 그냥 안봐도 뻔하다.전정국이겠지..... 아침마다 꼬박꼬박 전화하는 정국이도 참 대단했다. 난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잘잤어 정국아? 응 누나도. 오전엔 약속 있어. 여자야 여자. 응 오후에 보자 "
그냥 별 의미 없는 통화였다. 서로 잘잤냐는 안부인사와 오늘 만날 수 있냐는 말. 미안하다 정국아. 오전에 누나는 내 세컨드의 퍼스트 보러간다... 암만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런 커플이 또 어디있을까..

" 재밌네. 어서 씻어. 한채희 보고싶다며. "
저 새끼는 간이 얼마나 큰 걸까? 거의 뭐 러시아땅만한 것 같다. 지 여친 둘이서 만난다는데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실실 웃는 거 보면 뇌에 나사 하나 박힌 것 같은데... 약간 무서웠다. 으응 알겠어.. 라고 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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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게 그러니까.. 난 지금 내 남친의 여친을 보러가고 있는 중이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재미는 있었다. 뭐야 나 약간 스릴이 취향인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가 보니 저 멀리 아담하고 귀여운 여자가 서있었다. 아. 쟤구나?
그때 석진이 손을 흔들며 채희야~ 하고 부르자 그 여자가 여길 바라봤다.

" 오늘 이쁘게 하고 왔네. 아 여기는 내 회사동료 서여주. 가는 길이 같아서. "
첫문장부터 오글거림 한도초과였다. 몇개월전까지만 해도 좋아 죽을 것 같은 말이었는데 채희씨한테 먼저 썼겠지? 아침에 먹은 간장계란밥이 다시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퍼스트에게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김석진씨 회사동료 서여주라고 해요. "
" 헤헤. 안녕하세여!! 한채희라고 해요. 여주씨 엄청 이쁘게 생겼네여.. "
오마이갓. 너무 순수하고 깨끗한.. 그냥 요정 같았다. 뭐야? 채희씨가 훨씬 아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런 여자 두고 바람? 김석진은 맞아 죽어도 무죄일 것 같았다. 김석진에 대한 분노를 꾸욱 눌러 담으며 말을 건네었다.
" 채희씨.. 어쩜 이렇게 사람이 귀여워요...? 감사해요... "
" 아녜여!! ㅎㅎ 석진오빠랑 같이 일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세여.. "
김석진은 정말 개바보새끼가 맞았다. 저 말은 백프로 질투할 때 쓰는 말인데.. 저 새낀 뭘 저렇게 해맑게 웃고있지? 지금 귀여운 채희씨 질투나게 해놓고선?
안되겠다. 저 여자 마음도 모르는 새끼를 대신해서 내가 선을 그어야겠다.
" 채희씨, 잠시나마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 이제 남자친구가 기다려서.. "
" 헐헐. 죄송해여.. 얼른 가보세요! 저두 오빠랑 가볼게여.. "
역시. 남자친구 있다고 하니까 긴장 풀려서 웃음꽃이 활짝 피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럽지?... 왜 김석진 같은 나쁜놈을 만나는 거예요.. 미안해지게...
아아. 나도 이럴때가 아닌데. 난 급하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급히 이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자리를 뜬지 2분만에 내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누구지? 싶어서 확인을 해보니.. 미친. 김석진이다.
[ 석진이 ]
저녁에 연락할게.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