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거라는 예보는 없었다.
오히려 뉴스에서는 건조주의보를 강조했고, 습도 낮은 날씨가 이어질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하늘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김여주는 오래된 시외버스 좌석에 몸을 기대고 졸다가, 갑작스럽게 내리치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은 낯선 풍경이었다. 아니, 전혀 기억에 없는 장소.
버스는 언제 멈췄는지도 모르게 정차해 있었고, 승객들도, 운전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또 어디야…”
차창 밖으로 바라본 곳엔 오래된 기차역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정류장’이라는 팻말도 없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작은 간이역.
그리고 그 위에 붙은 간판.
[미드나잇 스테이션]
간판 아래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기차는 자정에 도착합니다."
김여주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서비스 없음'이 뜨는 화면이 그녀를 비웃었다.
혼잣말처럼 한숨을 내쉰 그녀는 버스에서 내렸다.
발밑에 고인 물이 신발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문제는 버스였다.
내리자마자, 문을 닫고 다시 출발해버렸다.
누구의 말 한 마디 없이, 목적지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녀를 여기 내려주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진짜 뭐야… 꿈이야 뭐야…"
역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부터 달랐다.
기묘하게 조용했다.
자판기는 고장 나 있었고, 매표소 창구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듯 형광등은 꺼져 있었지만, 안은 어쩐지 어슴푸레하게 밝았다.
그때였다.
“…오셨어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들려왔다.
여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역사 깊숙한 곳, 벽에 기댄 채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흰 셔츠 위에 베이지빛 재킷, 목이 살짝 헐어버린 슬리퍼.
너무 조용하고, 너무 단정한 얼굴.
그런데 그 눈빛이 이상했다.
사람을 본다기보다는, 오래된 기억을 꺼내보는 사람의 눈빛.
여주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여기… 어딘데요?”
그는 걸음을 멈추고 여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빛이 닿자 그의 얼굴이 또렷이 드러났다.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 있는 얼굴.
“여긴 미드나잇 스테이션이에요. 지나온 사람들이 오는 곳이죠.”
“…지나왔다니요? 제가 뭘요?”
그는 여주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뭔가를 잃은 사람들.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잊혀지기를 바라는 사람들만 여기에 올 수 있어요.”
“…….”
여주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저, 그냥 버스를 잘못 탄 것뿐이에요. 아무 데서나 내려준 거라고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역은 아무 데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여긴, 잘못 오지 않아요.”
기묘한 침묵.
여주는 계속 그를 주시했다.
어딘가 불쾌하게 익숙한 얼굴,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
“…기차는요? 여기 진짜 기차 오는 데예요?”
그는 손목시계를 흘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에 와요.”
“어디로 가는데요?”
“그건... 타봐야 알아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사기꾼도 아니고...”
그때였다.
기차역 구석에서 낮고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오래된 벽시계의 심장소리처럼, 둔탁하고 확실하게.
여주가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가 다가왔다.
“하지만 오늘은 못 타요.”
“네?”
“당신은 아직... 자격이 없거든요.”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단호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아는 사람처럼, 오히려 걱정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격이라니요. 대체 무슨…”
“기차는요, 떠날 준비가 된 사람만 데려가요.”
그 말에, 여주는 말문이 막혔다.
설명도 없고, 논리도 없다.
그런데 그 말이—이상하게 마음 어딘가를 파고들었다.
원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여주는 확신했다.
그는 진짜였다. 그냥 기차역 직원 같은 게 아니라, 이 장소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사람.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세요. 떠날 수 있을 때까지.”
여주는 혼자 역 벤치에 서 있었다.
어디선가 오래된 스피커에서 바람 소리 같은 음악이 흘렀다.
마치 과거로 연결된 라디오 주파수를 잘못 튼 것처럼.
그 순간, 여주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왜 버스를 탄 걸까.
왜 졸다 눈을 떴고, 왜 여기에 내렸으며, 왜 지금… 아무 기억이 안 나는 걸까.
그리고...
왜 그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너무 익숙한 걸까.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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