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주는 펜을 들었다.
긴장을 푸는 것도, 시작점을 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얀 종이를 앞에 두고, 마음이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내가 뭘 쓰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작게 중얼였다.
원빈은 아무 말 없이 창가에 기대 있었다.
빛은 어슴푸레하고, 바람은 조용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역에선,
마음의 속도만이 유일하게 흐르는 것이었다.
“일단 써보세요.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원빈의 목소리는 늘 그랬다.
크게 다정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절묘한 거리감.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만 가능한 말투처럼.
여주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펜을 종이에 대었다.
그녀의 첫 문장은… 뜻밖에도 너무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너는 모를 거야.”
손이 멈추지 않았다.
펜촉은 종이를 따라 움직였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잘게 부서진 조각들이 흘러나왔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는지,
얼마나 많이 웃는 척했는지,
또 얼마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너를 보내줬는지—너는 모를 거야.”
글씨가 번졌다.
눈물이 종이에 떨어졌다.
울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기억은 늘 감정보다 먼저 도착했다.
“…왜 이렇게 아프지.”
그녀는 종이를 내려다보다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그 순간 어딘가에서 벨소리 같은 딸랑—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창밖 플랫폼 끝에서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희미한 사람의 형체.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 그 모습,
그리고 흘러내린 카디건 소매.
여주는 숨을 멈췄다.
“…설마.”
그건 그녀의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누군가의 실루엣과 너무 닮아 있었다.
“누구예요, 저 사람…”
그녀가 작게 말하자, 원빈은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봤다.
“…그건 당신이 알아야 할 이름이에요.”
“근데…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기억이면, 그냥 꿈속에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억이 아니에요.
이건 흔적에 가까워요.”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역에 계속 머물러요.
그리고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들도… 여기에 돌아오죠.”
그 말에 여주의 숨이 잠시 멎었다.
“그럼… 그 사람도 아직 여기 있는 거예요?”
“당신이 붙잡고 있는 한, 네.”
그녀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방금 적은 문장이 마치 그 사람에게 붙잡혀버린 감정처럼 느껴졌다.
“너는 모를 거야.”
그 말이, 여주 자신에게도 진심이었고
그 사람에게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날 밤, 여주는 편지를 끝내지 못했다.
한참을 멍하니 종이만 바라보다
그냥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누군가를 부르던 순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던 뒷모습,
비가 오던 날의 공기.
그리고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날,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근데, 그냥 보내주는 게 맞는 줄 알았어.”
눈을 떴을 때,
김여주의 손끝은 아직도 펜을 움켜쥐고 있었다.
다음화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