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주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
불도 안 켜졌고, 창밖은 여전히 뿌연 안개가 떠 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은 어제보다 조금 더 뚜렷했다.
책상 위엔 어제 쓰다 만 편지가 그대로 있었다.
“너는 모를 거야.”
그 문장은 유난히 짧았지만,
어딘가 마음 한쪽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새로 꺼냈다.
펜을 잡는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아직도, 나한테.”
그녀는 그렇게 썼다.
놀랍게도, 이번 편지는 훨씬 쓰기 쉬웠다.
“그 사람한테 화가 났던 건,
나를 그렇게 떠난 거 때문이 아니었어.
나를 그렇게 만든 나 자신이 미웠던 거였어.”
단순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었다.
여주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진짜 잃어버린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앞에 두고도 아무 말 못 했던 자기 자신이었다.
“사실은 그날, 나도 말하고 싶었어.
‘가지 말라고.’
그냥 한마디면 됐는데,
왜 그렇게 입을 다물었을까.”
문장이 길어질수록 손이 빨라졌다.
감정이 터지는 게 아니라,
마치 마침내 멈췄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분.
그때,
원빈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잠이 안 와서요.”
“편지 쓰는 중이세요?”
“네. 이번엔, 저한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마디 덧붙였다.
“편지는요, 받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경우가 많아요.”
여주는 살짝 웃었다.
“…그럼 이건 진짜 저한테 필요한 말인가 보네요.”
“네.
김여주 씨는 지금,
당신 자신에게 돌아가는 중이에요.”
그 말에 여주는 말없이 펜을 다시 들었다.
마음속에서 무너졌던 자리를 하나씩 메우는 듯한 기분.
사실은 이 편지를 쓰기 전까지,
여주라는 사람이 누군지 본인도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종이 위 문장은 이렇게 끝났다.
“내가 울고 있었던 건
그 사람을 잃은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시간들이야.”
여주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종이를 접었다.
“…이제 하나 끝났네요.”
원빈은 그녀 옆에 앉았다.
역무실 창밖으로는 아직도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기다림이 덜 외롭게 느껴졌다.
“언제쯤이면 탈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그가 말끝을 흐렸다가, 조용히 마무리했다.
“…당신이 진짜 ‘떠나도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일 거예요.”
“근데, 그게…
떠나고 싶다는 건지, 아니면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그 두 개는 많이 달라요.”
“…그래요?”
“네.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미련이 있고,
떠나도 괜찮은 사람은 마지막 인사를 했거든요.”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화만으로도 편지가 하나 더 써질 것 같은 마음.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다시—딸랑.
희미한 종소리가 울렸다.
“기차… 또 오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누군가의 기억이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예요.”
“제 기억일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건, 김여주 씨가 알게 되겠죠.”
다음 화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