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기차는 자정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정확하게, 조용하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김여주는 기차에 오르기 직전,
다시 원빈을 돌아봤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말해줘요.
왜 제가 여기에 와야 했는지.”
원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당신은 이 역에 온 적이 있어요.”
“……네?”
“기억 안 날 거예요.
그땐 당신이 먼저 떠났거든요.
기억을 지우고, 편지를 불태우고—
정말 완전히, 다 놓고 갔어요.”
여주는 숨을 삼켰다.
그가 계속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신이 떠나고 나서도
당신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그게, 당신이에요?”
원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
여주의 기억 속 어딘가에서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자정, 플랫폼 끝에서
“가지 마”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웃던 사람.
“왜 아무 말 안 했어요.
왜, 내가 떠나는 걸…”
“붙잡았어요.
근데, 당신이 그걸 지우고 갔어요.
기억 자체를 없애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걸 왜 기억하고 있었어요?”
“누군가 한 명은 기억해야,
그게 진짜였던 사랑이니까.”
여주의 눈이 붉어졌다.
“…그럼, 나는 당신을 지우고 떠난 거예요?”
“그땐… 그래야 살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사랑이 너무 아팠다고.”
잠깐의 침묵.
여주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왜 난 다시 여기에 온 거예요?”
“기억은 지워도, 감정은 남아요.
당신이 잊은 건 이야기고,
기억한 건 느낌이었어요.”
“…….”
“그리고 이 역은,
그 느낌을 따라온 사람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에요.”
그 말에 여주는 무너진 듯 눈을 감았다.
진짜 기억이 하나씩 퍼즐처럼 돌아오기 시작했다.
둘은 연인이었다.
작년 여름
둘은 같이 기차를 탔고,
여행지에서 크게 다퉜다.
—“난 너랑 있으면 숨이 막혀.”
—“그래. 그럼 끝내자.”
그리고, 헤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여주는 이 역에 왔다.
그땐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편지를 쓰고, 기억을 태웠다.
그리고 원빈은, 남았다.
그녀가 지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미안해요.”
그 말 한 마디에,
플랫폼 위 공기가 달라졌다.
원빈이 말했다.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럼, 뭐였어요?”
“그때 우리가 진짜 사랑했던 게 맞는지—
그 대답이요.”
여주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건… 정말이었어요.”
기차가 문을 열었다.
원빈은 여주를 바라봤다.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작별이 아니라,
고백에 가까운 인사.
여주는 기차에 올랐다.
마지막 순간, 문 닫히기 직전—말했다.
“이번엔 내가 기억할게요.”
기차는 출발했다.
플랫폼 위, 원빈은 여전히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그의 표정에 미련이 없었다.
📘 에필로그
김여주는 아침에 눈을 떴다.
햇살이 창가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가슴 한쪽이 따뜻하게 무거웠다.
휴대폰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메시지 하나.
다음번엔, 같은 기차 타요.
발신자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