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빚진 시간

22화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

소희는 창가에 서 있었다.

 

 

커튼을 열지도 않은 채, 유리 너머 어둠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병원에서 나와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지민은 소희를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을 걸까 하다가,

끝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가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지민은 한 걸음 다가갔다.

너무 가까워지지 않게,

하지만 멀어지지도 않게.

 

“…오늘은 조금 괜찮아 보여서.”

 

그제야 소희가 입술을 뗐다.

 

 

“…괜찮은 게 아니에요.”

 

목소리는 낮았고, 힘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나요.”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말보다,

차라리 이 말이 더 솔직해 보여서.

 

소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떨려요.”

 

지민은 더 묻지 않고,

그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차가웠다.

 

“이상하죠.”

 

소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끝났는데… 더 무서워졌어요.”

 

“뭐가.”

 

“내가.”

 

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 리 없어.”

 

“있어요.”

 

소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쓰러졌을 때… 전혀 후회 안 했어요.”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 말했다.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소희가 말했다.

“밤이 되니까, 자꾸 그 얼굴이 떠올라요.”

 

“노창기?”

 

“…아니요.”

 

소희는 천천히 돌아서 지민을 봤다.

“당신.”

 

지민의 숨이 잠시 멎었다.

 

“당신이 피 묻은 손으로 날 안고 있던 얼굴.

 

...그 얼굴이 계속 떠올라요.”

 

소희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때 깨달았어요. 아, 이 사람은… 나 때문에 계속 다칠 거구나.”

 

 

“그건—”

 

“그만 말해요.”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

 

“선택이었다는 말,

지키고 싶어서였다는 말—

이제 너무 잘 알아요.”

 

잠시 침묵.

“그래서 더 무서운 거예요.”

 

지민은 입술을 눌렀다.

“나랑 있으면,”

 

소희가 말했다.

“당신은 계속 이런 선택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소희야”

 

“아니에요?”

 

“언젠가… 진짜로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 말에 지민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난 그거 못 견뎌요.”

소희는 고개를 숙였다.

 

“…사람 하나를 죽이고도 살아 있는 내가,

당신까지 망가뜨리는 건—”

 

말을 끝내지 못했다.

지민은 결국 소희를 끌어안았다.

강하게도, 느슨하게도 아닌 애매한 힘으로.

 

“그만해. 네가 날 망가뜨린 적 없어.”

 

“거짓말.”

 

“아니야.”

 

지민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넌 날 살렸어.”

 

소희는 웃지 않았다.

“그럼 왜 이렇게 아파요, 다들.”

 

지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이 흘렀다.

소희는 몸은 회복해 갔지만,

마음은 점점 더 조용해졌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창밖만 봤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며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날 밤,

지민은 테이블 위에 봉투 하나를 올려두었다.

소희는 그걸 보고도 바로 묻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예요.”

 

 

“비행기표.”

 

소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런던....? …장난이죠?”

 

“아니.”

 

지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서, 좀 쉬어.”

 

“도망치라는 거예요?”

 

“아니, 살라고.”

 

소희는 웃었다.

 

“…나를 보내는 거잖아요.”

 

“지키는 거야.”

 

“차이가 있어요?”

 

지민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있어.”

 

“…뭔데요.”

 

“보내는 건, 다시 안 보겠다는 거고.”

 

지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다시 데려오겠다는 거야.”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널 사랑해.”

 

지민이 말했다.

 

“그래서… 옆에 두는 게, 지금은 맞지 않은 것 같아.”

 

소희는 고개를 숙였다.

 

 

“난 당신 옆에 있는 게,

행복할 줄 알았어요.”

 

“나도.”

 

“근데.”

 

소희는 지민을 올려다봤다.

 

“당신 얼굴 볼 때마다, 죄책감이 먼저 와요.”

 

지민은 웃었다.

아주 슬프게.

 

“그럼 내가 실패한 거네.”

 

소희는 다가가

지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니에요.”

 

 

그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생각해줘서.”

 

지민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런던 가서,

배워. 싸우는 법 말고.”

 

“그럼 뭐를요.”

 

“버티는 법.

자기 자신이랑.”

 

소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 다녀올게요.”

 

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항의 출국 게이트 앞.

 

“연락—”

 

지민이 말하려다 멈췄다.

 

“안 할게요.”

소희가 먼저 말했다.

 

“…서로.”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잊지 마요.”

 

지민은 웃었다.

 

“그건 불가능해.”

 

소희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시 올 땐,

도망치지 않을게요.”

 

그리고 돌아섰다.

비행기가 이륙했고,

 

지민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남은 건,

식어버린 소희의 체온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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