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빚진 시간

23화 런던에서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를 때, 소희는 끝내 창밖을 보지 않았다.

귀가 멍해질 만큼의 압력 변화도,

기내에 퍼지는 미묘한 진동도....

.

.

.

지금의 그녀에겐 전부 남의 일이었다.

 

 

앞좌석 등받이만 멍하니 바라본 채,

손은 무릎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진짜 가는 거네.’

 

실감은 늦게 왔다. 아니, 어쩌면 애써 미루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보다 지민의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감각이 먼저 가슴을 찔렀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 지민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소희는 알고 있었다.

뒤돌아보는 순간, 놓아야 할 손을 다시 잡게 될 걸 서로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돌아보지 않았다는 건.. 울고 있었다는 걸까...

.

.

그래도…’

 

소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게 맞는 선택이야.’

 

“음료 드릴까요?”

승무원의 목소리에 소희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 아, ... 물로 주세요.”

 

컵을 받아 드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괜히 감정을 들킬까 봐, 그녀는 물을 마시지 않고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울지 말자.

지금 울면,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아...

당신 곁으로...'

 

 

런던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던 비는 마치 이 도시의 인사처럼 차분했다.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습기 섞인 찬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생각보다 춥네…”

 

중얼거린 말이 바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한국에서 떠나던 날, 그날의 햇살은 유난히 따뜻했었다.

마치 마지막까지 잡아두려는 것처럼.

 

 


 

 

숙소는 이미 준비돼 있었다.

지민이 손을 댄 게 분명한 공간이었다.

과하지 않게 깔끔했고, 불필요한 장식 하나 없이 소희가 쓰던 물건과 비슷하게 꾸며져있었다.

 

소희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천천히 방을 둘러봤다.

 

 

“..... ㅎ”

 

괜히 웃음이 났다.

여기에도, 그의 배려가 있었다.

 

‘정말 끝까지…

너한테 내가 어디까지 고마워해야할까

.....

당신에게 빚을 갚아야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소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어깨에 힘이 풀리듯 내려앉았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일부터 일정이 있다고 했으니... 일단 쉬자.. 아무 생각없이"

 

 


 

 

 

훈련은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됐다.

경호, 근접 전투까지 하루 일정이 빽빽하게 채워졌다.

 

“한국에서 왔다고?”

 

경호 강사 중 한 명이 소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

 

“... 넵 맞습니다.”

 

“눈빛이 특이하네.”

 

“네?”

 

“눈빛이 슬퍼.. 괜한 얘길 한건가? ㅎ 실례라면 미안하네”

 

소희는 잠시 말을 고르다 낮게 대답했다.

 

 

“…살려고 왔어요.”

 

"...?"

 

"저를 지키고 싶어서요. 그래서 경호도 배우는 거구요"

 

".... 좋다. 열심히 배우도록!"

 

그 말에 강사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더 좋았다.

.

.

 

몸은 매일같이 멍투성이가 됐다.

근육통에 잠에서 깨고, 다시 이를 악물고 훈련장으로 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소희는 떠올렸다.

연기 자욱하던 방과 귀를 찢던 총성을.

 

그리고,

 

“소희야.”

 

그 목소리....

 

‘널 많이 아껴 소희야.’

 

그 기억들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밤이 되면,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작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기대 앉아 있으면

생각은 어김없이 그에게로 흘렀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연락하지 않기로 한 약속은 사실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서로를 위해서라고 믿었지만... 지키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휴대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 !!!! 보내면 안 돼...’

 

비가 유난히 거세게 내리던 밤, 소희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


“……지민 씨.”

 

이름을 부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잘하고 있어요.”

 

대답은 없었지만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아직은… 많이 무서운데.... 그래도 도망치진 않을게요.

....

.

.

보고싶다, 많이."

 

..

.

.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계절이 바뀌고, 소희의 몸과 마음은 점점 단단해졌다.

눈빛도, 걸음도 예전의 소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전과 달라진 밝은 그녀와 잘 어울려 지냈다.

사람들의 그 달가움이 소희는 싫지 않았다.

 

‘… 예전의 난 ... 이제 없을꺼야’

 

 


 

 

어느 날, 훈련이 끝난 뒤 강사가 소희를 불렀다.

 

“한소희.”

 

“네?”

 

" 계속 경호 쪽으로 계속 갈 생각이지?”

 

소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ㅎㅎ 너 재능 있어. 이제 한국 가서 더 채우면 될 것 같애”

그 말에 소희는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

.

.

 

그 날,

소희는 처음으로 미래를 떠올렸다.

도망치지 않는 미래를....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서 있는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참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 다시 마주할 얼굴 하나

 

“그때는…”

 

소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앞에,

.

.

 

부끄럽지 않게 설게요.”

 

창밖의 비는 그쳤다.

런던의 밤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녀의 눈은 온기로 충만해보였다.

.

.

.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