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빌런 10

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3일, 고작 72시간.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2일이지. 48시간 정도?"

"아오, 진짜 생각할수록 열이 뻗쳐서,"


빳빳하게 약품을 먹인 특수 장갑을 끼며 한여주가 투덜거렸다. 팀 BTS의 숙소로 사용되는 빌딩의 지하 훈련장 내. 설렁설렁 몸을 풀며 한여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석진과 한여주가 나누는 대화소리가 울려 퍼졌다.


"센터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언뜻 듣기에 평온하게만 들리는 김석진의 목소리엔 미약한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하기야, 3일 내 출정이라는 미쳤나 소리 나올 법한 일정에, 그 내용까지 말도 안 될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임무를 받았다면, 속에서부터 들끓는 화를 온전히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장갑 낀 손을 몇 번 쥐락펴락 하던 한여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심보 고약한 노친네들 같으니라고, 가서 콱 뒈져주면 고맙겠다 이거지."

"이왕이면 팀 전체가 말이지."

"그러니까. 애초에 도망자 신세였던 주제에 우리가 뭐 큰 대접 바라겠어? 가만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전쟁에서 승기 가져와 준대도 뭐가 그리 아니꼬워서는,"

"가만 냅둔다니, 그런 것치고는 전정국한테서 제대로 뜯어낼 생각 만만이던데. 걸린 게 무려 원하는 걸 다 들어주겠다는 조건이었는걸."

"그건 도련님한테 뜯어내는 거니까 논외로 쳐야지. 애초에 윗대가리들이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겠댜마는."

"알고 있었으면 이런 극상급 임무로는 안 끝나지. 이미 네 방에 살수가 들어도 몇 번은 들었을텐데."


그렇겠지. 센터 내의 그 조그마한 권력도 놓기 싫어 아등바등거리는 인간들이니까. 한여주가 가장 한심하게 여기는 이들이 그런 부류였다. 센터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말에 가장 먼저 반대할 사람들. 지금의 센터에서 얻어내는 것이 있기에 바뀌는 것을 지독하게 꺼릴 이들.

전정국이 센터 내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현 국장보다 전정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훨씬 크다 해도 센터의 핵심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현 국장을 지지하고 있으니, 암만 쪽수가 많다 한들 명분에서 지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러니 전정국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제한적일 수밖에.


"그래도 네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우리는 전정국 직속으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센터 소속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전정국이 센터 소속이라 의미는 없긴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나."

"거절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 뒤가 문제지. 어떻게든 이 임무를 우리에게 맡기려고 아득바득거릴 수도 있고, 어쩌면 이 임무보다 몇 배는 더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길 수도 있겠지. 그리고 도련님은 그걸 완전히 막아내지 못해. 결국 언제 한 번은 저 윗선들 뜻대로 놀아나야 할걸?"

"이왕이면 지금 놀아나는 게 낫다?"

"음, 말하자면 기선제압 같은 거랄까? 사실 임무를 성공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어가는 거야 일도 아니거든. 도련님 입지도 지금보다 훨씬 단단해질 거고, 어쩌면 윗분들 중에서 도련님 쪽에 줄 대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지. 그만큼 도련님의 능력이 제법 괜찮다는 걸 증명해낸 셈이니까."

"그래서?"

"그럼 자연스럽게 우리 처지도 나아질 테니까~, 하루 이틀 머물 것도 아닌데 허구한 날 시비 걸리는 거 감내하며 다닐 순 없잖아."


김석진은 얼마 전 태형에게 더러운 종류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에스퍼 셋의 얼굴에 주먹 자국을 선명하게 찍어준 한여주를 떠올렸다(그리고 그 일로 전정국에게 귀를 잡혔던 것도. 제법 충격적이라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뿐일까, 더러운 도망자들이라며 시비가 걸렸던 것이 3일 전, 재수 없는 새끼들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 불과 어제였다.

김석진은 그러한 시비들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처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나 한여주는 아니었다. 그는 이왕이면 센터에서의 생활이 평온하고 안락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물론, 한여주 자신과 김석진에게는 영원이 해당될 일 없을 일이겠지만 센터 생활이 처음인 김남준과 김태형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을 테니.

일종의 버릇과도 같았다. 언제 올지 모를 한참 먼 미래를 미리 그려놓는 것. 이왕이면 김태형과 김남준이 센터에 좋은 기억을 가지게 되길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훗날 전정국이 꽤 괜찮은 형태의 센터를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센터가 그들에게 일종의 집, 그 비스름한 것 정도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김석진과 한여주가 센터에 붙박혀 있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까지 꼭 떠돌아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아무튼 성공만 하면 되니까."

"그 성공이 어려우니까 문제지."


훈련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며 김석진이 말했다. 양반다리로 앉아서는 턱까지 괸 채 한여주를 쳐다본다.


"이유가 그거 뿐만이 아닐텐데. 너 그런 이유에 목숨 거는 사람 아니잖아."

"안 좋은 뜻이지 그거? 나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니야?"

"사실인데 뭘.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닐텐데."

"흠,"

"뭔데? 3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점까지 상쇄시킬 만한 이유."


샐쭉하게 눈을 흘긴 한여주가 걸음을 옮겼다. 훈련장 벽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지도 위로 한여주의 손가락이 뻗어어나간다. S 201, H 1101. 센터에서 쓰는 특수한 좌표값 위에 붙어있는 빨간 스티커를 톡 건드렸다. 이번 임무의 목적지였다.


"이거, 요새를 수치화한 것 치고는 좌표값이 상당히 애매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한여주의 말에 김석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한여주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센터에서 사용하는 좌표의 단위는 두 가지. S와 H, 그리고 M과 R. S와 H는 비교적 큰 단위의 좌표값, M과 R안 그보다 작은 단위의 값을 사용한다. 즉, 작은 단위의 값을 사용하는 M과 R이 더욱 정확한 위치를 표시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요새와 같이 위치가 비교적 정확하게 특정되어 있는 장소를 표시할 땐 M과 R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센터에서 지낸 시간이 상당한 김석진과 한여주가 이를 모를 리도 없었으니, 요새를 치라는 임무를 내려놓고는 S와 H를 사용한 좌표값을 준다는 것이 수상쩍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 센터에서 팀 BTS가 전멸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팀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작용할만한 정보를 던져주었다. 둘, 그런 치졸한 이유는 아니고, 그저 요새의 좌표를 M과 H로 특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뿐이다.


"생각을 해봤지. 엿 먹이고 싶어서 이러나 싶더라고. 그런데 요 며칠 자료도 찾을 겸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알아봤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고. 이 요새, 최전방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잖아,"

"가장 가까운 적진의 요새니까."

"그러니까, 센터 입장에서는 여기를 굳이 점령하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 그냥 놔두면 오히려 센터의 상황이 위험해질 우려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적진의 본부로부터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기도 하잖아? 근데 아직까지 센터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좀 이상하지."

"확실히…."

"그렇다고 센터가 저기를 아주 포기한 건 아니거든. 이거 봐봐."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던 한여주가 종이 몇 장을 들고 쪼르르 김석진에게 다가왔다. 여기 봐봐, 하며 바닥에 깔아놓는 종이에는 한여주의 필체로 메모들이 빼곡하게 쓰여있었다. 메모를 하나하나 살피던 김석진이 감탄할 만큼이나 중요한 정보들도 간혹 보였다.

하루, 겨우 하루였다. 임무를 전달받은지 겨우 24시간 내 이만한 정보를 모으고 또 추려 쓸 만하게 걸러내는 데 겨우 하루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니 센터에서 탐을 냈지. 김석진이 생각했다.


"10번도 넘게 팀을 보냈는데 죄다 실패했어. 심지어 정예 팀도 보냈거든. 근데 이거 봐, 실패, 실패."

"실패 사유도 다 엇비슷하네. '요새 위치 파악 불가'?"

"그치, 그러니까 내 생각엔, 아마 이 요새의 대가리가 제법 특수한 이능을 가진 것 같거든? 그러니까 이를테면,"

"……."

"요새의 위치를 숨길 수 있는 이능이라거나?"


김석진이 입을 헤 벌렸다. 센터가 못 찾을 만 하네. 하는 말에 한여주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웃었다. 그치? 오빠가 생각하기에도 이만한 능력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지?


"공간의 이능. 아마도 A급? 몇몇 팀에서 '요새로 보이는 아지랑이를 몇 번 목격한 바 있다'라는 기록들이 있으니 아주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한 것 같아. S급은 절대 아니야."

"…난 너 따라가려면 멀었다. 소름이 쫙 돋네."

"별말씀을, 운이 좋기도 했고."


요새의 위치를 숨기는 것으로 아주 꽁꽁 숨어버리는 방법. 어지간한 사람은 생각도 못할 방법이었다. 특히나 '특수 이능'으로 분류된 공간의 이능은 이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이 적었기에 이러한 방식의 이능의 사용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저, 팀 BTS의 몇몇 이들이 예외였을 뿐.

참으로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공간을 뒤틀어 그들의 보금자리를 숨기는 방법으로 도망자 생활을 몇 년이나 이어가던 이들에게는 말이다.


"누나!"

"우리 왔어, 근데 2일 뒤가 출정이라며?"


괜찮은거 맞아? 훈련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한여주와 김석진의 시선이 훈련장 입구를 좇았다. 응, 2일 뒤. 한여주의 대답에 질문을 던진 김남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임무도 쉽지 않다던데 괜찮겠어?"

"응? 당연하지. 내가 언제 무리해서 계획 세우는거 봤어? 이건 우리가 이길 수 밖에 없어."


김석진이 키득거렸다. 김태형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김남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여주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너넨 A급이지? 우린 무려 S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