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좋아한 잘못 (bl)

03. 친절해준 사람

수업이 시작됐지만 훈의 귀에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연필 끝이 공책 위를 맴돌기만 했다.


반대편 자리에서 순은 친구랑 쪽지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음을 참기 힘든 듯 엎드려 몸을 들썩거리기도 했다.


훈은 괜히 시선을 떨궜다.


아는 척 안 하는 거… 원래 그런 거겠지


종이 넘기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사이로

순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애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났고순도 자연스럽게 친구들 사이로 섞였다.


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공책만 정리했다.

혹시 순이 다가오진 않을까 기대했다.


…오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책상 옆에 기대 섰다.

- 야

고개를 들자 같은 반 애였다.

순이랑 자주 붙어 다니는 애.


- 너 진짜 쟤랑 사귀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훈은 잠깐 말을 잃었다.


- …응


들릴 듯 말듯 작게 대답했지만, 그 애는 피식 웃었다.


- 신기하네.


그 말이 묘하게 걸렸다.

왜 신기하지?


훈이 뭔가 더 묻기도 전에 순의 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순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훈에게 남겨진 건 찝찝한 기분뿐이었다.


점심시간, 훈은 급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다가 멀리서 순을 발견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떠들며 웃고 있었다.

목소리도 크고, 표정도 밝았다.


어젯밤 메세지에서 보던 짧은 말투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애써 못본 척 순과 꽤 떨어진 자리 끝에 혼자 앉았다.

숟가락을 들었지만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 왜 여기 혼자 앉아있어?


우리 반 반장이었다.


훈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 아… 그냥…


평소에 대화를 하는 상대도 아니었고, 같은 반인 점 빼고는 특별한 친분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훈의 앞자리에 앉아 친근하게 이야기를 건넸다. 


아, 또 선생님이 시키신걸까?

작년엔 훈이 하도 조용한 탓에 선생님이 작년 반장에게 훈을 챙겨주라고 했었다.

겉은 친절했지만 뒤에서 훈의 온갖 욕을 다 하고 다녔기에 훈의 이미지는 오히려 나빠졌다.


- 넌 원래 좀 조용한 성격이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훈은 잠깐 멍해졌다.

어제까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던 애가 갑자기 내 앞에 앉아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연기라기엔 너무 달콤했다.

의도 없는 순한 눈과 부드러운 미소 모두 훈을 향했다.

언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았지?

그냥 말 한마디일 뿐인데 훈의 머릿속에선 소설 한통이 펼쳐졌다.

 

- 응, 나 좀 조용해…


훈이 조심스럽게 답하자 반장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 그..그니까 나 걱정할 필요없고.. 선생님이 시키신거면 안그래도 괜찮아…!


- 난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온거야


나에게 이렇게 다가와준 이가 있었나? 학교에선 없었고.. 내 인생에서도 없었던 것 같다.


- 책을 많이 읽더라. 요 며칠 지켜봤는데, 나랑 좀 잘 맞을 것 같아서.


 아, 책 좋아해? 


나를 지켜봤다고? 언제부터?

내 신경이 온통 순에게만 쏠려서 몰랐나?


 응. 좋아해. 너 틴에지 시리즈 세븐틴부터 없는 것 같던데, 빌려줄까?


 정말..? 나한테 빌려줘도 괜찮아?


 뭐 너만 괜찮다면 당연히 괜찮지!


오랜만에 받는 친절에 괜히 심장이 들떴다.


 … 고마워


오랜만에 즐거운 점심이었다.

순이 벌써 급식실을 나갔으려나 하고 순이 있던 쪽을 한번 돌아봤다.


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훈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훈은 순을 뒤로하고 기다리는 반장을 향해 걸어갔다.

순의 눈빛이 좀 날카로웠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교실에 막 도착했는데 문이 쾅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이었다.


순은 빠른 발걸음으로 훈에게 다가왔다.


 오늘 나 좀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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