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부터였을까, 난 말이 없었다. 항상 동생의 재롱에 온 가족이 웃었고 육지고기는 그런 동생의 앞에만 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올라갈 때쯤이였나.. 태형은 자신에게 놓여진 두 개의 후라이 중 하나를 내 공기밥 위에 얹어주었다.
“누나, 나 오늘 학교에서 싸웠어. 나 여기 아파.”
“뭐 조금 까였네, 그거로 아프면 사내가 아니지.”
“그럼 나 안 아플래, 내가 누나 지킬래 그럼.”
하얗고 조그마한 눈사람이 말을 한다. 그 눈사람이 숟가락을 내게 쥐어주곤 결코 밥을 먹으라고 웃어준다.

“야야야ㅑㅑ 김여주!! 체육복. 체육복 내놔!!! 아 시간 없어!!!!”
“넌 체육복 나한테 맡겨놨냐?”
“그리고, 뭐? 야? 맞을래?”
우리는 학교에서 조금씩 말을 트기 시작했다.
태형은 교실문을 잡고 허겁지겁 나를 불러내 손을 뻗었다.
“아 체육복 누나거 너무 작아, 다른거 없어?”
그때, 태형이 뻗은 손바닥 위에 다른 체육복이 하나 올려진다. 그끝엔 어김없이 석진이 태형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누나 그만 괴롭히고 이거 입어. 더럽히면 선배한테 죽는다.”
태형은 나와 석진을 번가라보며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야? 둘이 뭔데? 체육창고에 같이 들어올때부터 알아봤어. 뭐야! 말해! 누나랑 이 아저씨 뭔데!”
“친구.”
내 말에 석진은 풀이 죽듯 눈이 댕그래져 날 바라봤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난 웃으며 말을 바로 했다.

“남자 친구”
태형이 씩씩거리며 교실문을 닫자 석진은 내게 바로와 옆에 앉았다. 석진은 날 빤히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듣고싶은 말이 있는 듯 눈만 껌뻑거렸다.
“대답. 다시 대답해줘.”
“ㅁ뭐..뭘 대답해”
“내가 너한테 친구 아니고, 뭐라고?”
“또 그런다 또“
”종이, 어제 그 종이에 대답해준거지?“
또 두 볼이 빨개져 입이 안 떨어진다. 심장은 죽을 듯이 뛰는데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아 그래! 하자고, 연애“

자꾸만 담임선생님께서 내 주위를 맴도신다. 체육창고 사건 이후로 선생님은 이상리만큼 나와 잘 마주친다.
“이번엔 또 뭐야”

“아직 미정인데, 시끄러울 가능성은 높아요“
”너는 계획 세우고 사고치냐?“
”효율적이잖아요”
선생님은 이마를 짚는다.
“오늘은 얌전히 지나가거라”
“노력은 해볼게요”
“그 ’노력‘이 문제야“
나는 교무실에서 혼나는 일보다 선생님을 돕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에게도 ’스승’이자 ‘친구’가 생겼다.
“야! 이번엔 진짜 조용히!”
“네! 사고는 최대한 최소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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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시점
내 양쪽으로 두 남정네가 가로막는다. 난 헛웃음을 지으며 사이에 낑겨있다.

“말 해봐, 그래서 둘이 사귄다고? 김여주랑? 선배가? 아니 왜? 왜 우리 누나지?”
“야 넌, 말 뽄새 좀 고쳐“

“여주 귀엽잖아. 똘망똘망한게 꼭 공주같아, 말 없는 공주”
“아 좀 비켜봐, 김태형 너는 선배한테
말 좀 이쁘게 하고..”
태형
”와 벌써부터 형 편 드는거야? 나 진짜 너무 서운하다“
석진
”선배님.“
”넌 근데 요새 조용하다. 진짜 나랑 약속 지키는거야?”
태형
“당연하지, 내가 언제 누나 약속 안 지켰다고”
석진
“내 말은 그냥 무시하네”
태형
”근데, 석진형은 우리 누나 어디가 좋다고 사귀어?
연애상대로는 잼병일텐데“

“예전에, 예전부터 반했었어”
태형
“뭐야, 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어?”
난 석진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석진
“나 유치원 다닐때, 난 엄마보고싶다고 맨날 울고 우리 해바라기반에 진짜 조용했던 애가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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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의 과거
“퉽ㅌ테테 으아앙 엄ㅁㅏ..엄마 보고시퍼..”
석진의 앞으로 여주의 고사리 손이 보인다.
“소꿉놀이..내가 엄마 해줄게”
“흐응ㅂ..흐읍..끄윽..엄마..?”
“응, 내가 엄마, 너는 아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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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진짜 조용했던 애라 이름도 몰랐는데, 자꾸 기억에 남더라고, 내게 처음 뻗어준 그 손이, 그 마음이 너무 고마운 기억이라“
”아! 맞아, 그때 제일 만만해보이던 놈 하나 있었어“
태형
“…아 짜증나, 김여주 쟤 집가서 저거 화장 지우잖아? 동물의 왕국이야. 원숭이라고”
석진
“아닌데, 예전이랑 똑같아, 귀여워, 예뻐, 기특해”
“…둘 다 가, 아 가버려.”
난 두 볼을 붉힌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집을 가는 내내 석진의 말들이 떠올랐다. 자꾸만 한 마디 한 마디 들을때마다 걸러질 말 하나 없이 순수하고..순수하고..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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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걔네 이름 또 까먹었네, 누구더라 조용한 애 하나랑
미X남자애 하나 둘이 남매래“
”걔네 이제 캐릭터성 생겼어, 조용한 애가 오히려 미X여자애고 문제아 걔가 요즘 더 조용하더라”
드르륵-
“누나, 미안.”
교실 문이 열리더니 체육복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태형은 다급히 체육복을 떨어트리곤 다시 사라졌다. 교실 문으로 다가가 체육복을 주워보이 이름표엔 ‘김석진‘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 맞다, 석진이가 빌려줬었ㅈ”
근데, 근데 망할
떠났던 체육복은 노란색이였는데, 돌아온 체육복은 갈색이다.
“김태형 넌 집가서 뒤졌다.”
나에겐 석진이라는 친구가 생겼고, 태형이에겐 스승이라는 브레이크가 생겼다. 우리는 그렇게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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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스탑, 화장실로.”

“응? 아이..누나..나 집안일엔 소질업어..”
화장실 문을 열어 태형이 어지럽힌 체육복을 화장실 다라이에 던졌다.
“아이 그리고..세탁기라는 유명한 신물물이 있는데 왜..”
“신명나게 맞고 할래, 그냥 할래”
“제가 또 손목근육이 짱짱한 18세라 깨끗히 빨고, 향기나게 걸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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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렇게 마지막 12월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