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03. 기억을 걷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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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걷는 시간















내가 자신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보이자 남자는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다음,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나 역시 가만히 그와 눈을 맞췄고, 괜히 이상한 감정이 느껴졌다. 설레거나 두근거리는 그런 흔한 감정이 아니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혼돈 같은 거였다.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김여주…”





전정국이라는 이름을 들었으니 나 역시 내 이름을 알려줬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름 같은 건 알아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내가 저 남자의 이름을 물었던 건,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이 남자의 이름이 전정국이 아닌 이준이었다면… 이런 생각 자체가 나쁜 짓이다. 하지만 난 이준이 아닌 전정국이라도 보고 싶다. 이준과 닮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나이는?”

“열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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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갑이네요?”





나와 동갑이라는 그의 말에 두눈이 휘둥그래 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정국은 이준과 너무나 닮아있다. 그럼 난 더더욱 이 남자를 놓칠 수 없었다. 이준을 볼 수 없다면, 전정국이라도 봐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전정국! 사진 다 나왔어-!”





전정국의 친구들이 민윤기와 함께 인화소에서 나왔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전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역시 그의 손을 놓았다.





“전 이만 가볼게요. 반가웠어요.”





그와 떨어져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이대로 전정국이라는 남자를 놓치면 언제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아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한 번 만나버린 이상, 나는 저 얼굴을 잊은 채 지낼 순 없을 거다.

이준이 아니라도 좋다. 그냥 닮은 사람이라도 만족한다. 내가 힘들지 않고, 숨을 쉴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더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저, 전화번호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폰 주세요.”

“제 폰이 탈의실에 있어서… 여기에 적어주세요.”





하필 오늘 마지막 날이라고 열심히 사진만 찍겠다는 다짐에 폰까지 탈의실에 두고 온 게 잘못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꺼내 그 남자에게 건넸다. 번호를 받을 나의 왼팔과 함께 말이다.

내게서 볼펜을 받아든 남자는 입꼬리를 올린 채, 내 왼팔에 자신의 번호를 적었다. 볼펜이 피부에 닿아 그림이 그려지듯 살살 움직이는 게 간질거렸다.





“연락… 해도 돼요…?”

“하라고 준 건데?”

“연락 꼭 할게요!”





이준과 닮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에 활짝 웃었다. 많이 울어 시뻘개진 눈이 따끔거렸다. 그런 것 따위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그저 행복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다음에 만나면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란 설렘이 두둥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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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의 마지막 알바가 결국 끝이 나고, 탈의실에 빠르게 들어가 폰을 찾았다. 폰을 열고 왼팔에 자리잡고 있던 그 남자의 번호를 곧장 저장한 뒤, 그제서야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유니폼을 단정하게 걸어두고 짐을 다 챙긴 채 밖으로 나오니 올 블랙의 민윤기가 보였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나왔어.”

“아-, 피곤하다…”





민윤기는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다. 내가 유일하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민윤기였다. 민윤기는 나와 이준의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매일 다정하다가도 이준 일에는 차가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 많이 닮긴 했더라.”

“어? 아…”

“근데 딱 거기까지야. 네가 걔 잊으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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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힘들어하는 거 다시는 못 본다.”





꽤 단호한 말투였다. 그 남자와 엮일 생각 따위는 죽어도 하지 말라는 경고 같은 느낌. 민윤기는 누구보다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준이 떠나고 남겨진 모습까지 옆에서 다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기에.
 
근데 어떡하지? 윤기야, 나 여전히 준이가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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