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햇살에게

나의 햇살에게. 02

photo


저작권 ⓒ 2022 예지몽 모든 권리 보유.









아무 소리도 없는 방 안에서 조용히 고데기를 들었다. 딱히 가고 싶진 않았던 사교 모임. 가식적인 행동을 취해야 하는 곳. 하지만 손은 머리를 세팅하고 있었다. 고데기로 머리를 한 뒤에는 향수를 뿌렸다. 은은한 꽃향. 구두까지 신고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슈트를 깔끔하게 빼입은 윤기가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른다.





"갈까?"
"응."




마주 잡은 손은 열평형 상태에 의해 온도가 같아진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그 온기에 스며들 때 나는 그 분위기에 질식사 할 것 같았다. 몽글몽글, 간질간질거리는 느낌이 온몸에 퍼져 내 몸이 어색해지곤 했다.





"... 오늘따라 가기 싫다."





이런 날에는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2천 원짜리 컵볶이가 생각나기도 하고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나를 환영하는 레드와인잔보다 얼마 안 하는 편의점 맥주가 생각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이 모임의 주최자인 K기업 회장님의 비서분이셨다. 입고리를 당겨 웃으며 인사를 드린 후 구석진 곳에 앉았다. 윤기도 부모님과 함께 다른 테이블로 갔다. 웰컴주로 따라준 레드와인잔을 빙빙 돌렸다. 와인을 한입 음미했을 때는 입안에 레드와인의 입 안에 향이 퍼졌다. 여전히 맥주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래도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여주야, 왜 이리 구석진 곳에 있어."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요."
"그래도 잠시면 되니까 중앙으로 가자."





재벌의 부모 치고는 딱히 나쁜 부모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닥 좋은 부모도 아니었지만.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랑은 적어졌지만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줬었다. 경영에 관심이 많았던 오빠와 달리 나는 경영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시작한 사업인 카페에 관심을 가졌다. 그 점에서도 별 말 없으셨다.





"요즘은 어때."
"그냥 평범하게 대학교 다니고 있어요."
"본가도 좀 들려 계집애야. 애 얼굴 잊겠다."





어머니가 장난스럽게 딱밤을 날렸다. 아파서 얕은 신음을 흘리자 오빠가 엄살이 심하다며 나를 뭐라했다. 아픈 걸 어떡해.




"씁... 아파라... 그 정도는 아닌데."
"뭐가 아니야. 윤기랑 논다고 정신 팔렸지."
"어머니. 사랑에 빠진 딸을 이해하실 순 없으신가요."
"장난 치는 건 지 애비를 쏙 닮아서..."




그저 그렇게 평범한 집안이었다. 그때 이 모임의 주최자인 K기업 회장님의 말씀이 끝난 건지 박수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작인 거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벌써부터 친목을 과시하느라 바빴다. 물론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가식적인 친목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영아 씨 요즘 더 예쁘시네."
"예영 씨도요."
"여주는 이제 몇 살이지?"
"20살이요."
"한참 좋을 때네."




뭐라 하는 건지도 모를 그런 말들이 오갔다. 앞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눈웃음을 싱긋 지어주고 이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척했다.




"영아 씨 그거 알고있지? M기업 요즘 치고 올라오고 있는 거?"
"알고있죠. 저희와 요식업 하고 있으니까요."




M기업은 윤기네를 말하는 것 이었다. 그렇구나, 요즘 잘 되고 있구나. 윤기네는 그닥 큰 기업은 아니었다. 말을 계속 들어보니 요즘 상승세? 라는 것 같았다.




"맞다. 여주가 그쪽 막내아들이랑 친하지?"
"... 네."
"어떻게 친해졌대?"
"예영 씨, 그 얘기는 넘어가는 게 어떨까요?"




웃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에 묘한 냉기가 돌았다. 눈치만 보던 내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뒤를 돌았다.





photo

"누나. 같이 나갈까?"





윤기였다. 어떻게 내가 곤란할 때만 나타나는 걸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에게 인사를 한 후 일어섰다. 윤기에게 손을 붙잡힌 채 룸 밖으로 나왔다. 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기는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photo

"... 누나 춥겠다."
"... 괜찮은데."





귀여운 얼굴과 달리 차갑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한 고요한 눈은 언제나 내 맘을 어지럽혔다. 윤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공기가 멈추는 듯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윤기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피우곤 했다. 그러면 평소 내가 알던 윤기가 맞는 것 같았다.





"안 들어가도 되는 거야?"
"응. 괜찮아."
"... 알았어."





윤기의 숨소리에 파묻힌 채 나 자신을 숨겼다.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푸욱, 깊이, 더 깊이 파묻혔다. 내 이마에 닫는 너의 입술에 오늘도 살아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