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햇살에게

나의 햇살에게.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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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왔어?"

"네."

"오늘도 그 여자 만난 거야?"

"그렇죠 뭐."

"너도 끈질기다 진짜."





윤기는 호탕하게 웃으며 칼단발에 붉디붉은 색의 립을 바른 여자의 옆에 앉아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따라드릴까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웃음을 잃지 못한 채 텁텁한 공기에 울려퍼졌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곧 끝내려고요. 떼먹은 돈도 많고."

"항상 보면 밑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제일 호구 같아."

"맞아요. 멍청하게. 질 흐리고 다니는 것도 모르고."

"윤기도 한 잔 할래?"

"좋죠."





가게 안에서 나오는 클래식 소리와 묘하게 기분 나쁜 숨 막히는 공기에서 윤기는 미치광이처럼 웃었다. 평생을 이 순간들을 위해 살아왔었던 그의 삶을 돌아보았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술을 한 입 했을 때는 혼자 남은 여주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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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청해."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여주에게 연락이 오는 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윤기야. 오늘 누나랑 잘래?"

"맨입으로요?"

"당연히 아니지."

"누나, 벗겨줄까요."

"푸흡, 좋아."





두 남녀의 입술이 얽혔다. 그의 큰 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툭툭 풀려나가는 단추와 함께 붉은 꽃들은 꽃을 피웠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 무자비하게 여주를 공격하기만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살갗이 뚫린 듯한 고통이었다. 끝도 없이 깜깜한 밤 하늘이 여주를 집어삼킨 듯 여주는 겨울에 속수무책이었다.



잔기침이 나올 때쯤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따뜻한 집의 공기에 겉옷을 벗지도 못한 여주는 윤기의 연락을 기다리는 듯 폰을 꼭 쥔 채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차가운 겨울은 그녀에게 따뜻하고 포근한 꿈을 선물해주지 않았다.







여주가 눈을 떴을 땐 새벽 4시였다. 폰은 알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여주는 겉옷을 옷걸이에 걸고 따뜻한 물을 욕조에 받기 시작했다. 하늘은 여전히 모든 걸 집어삼킨 검은색이었다.





"... 윤기야. 겨울은 항상 왜 이리 차가운 걸까."





한참을 기다려도 들리지 않는 대답에 여주는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몇 번을 윤기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흘러넘치는 욕조의 물에도 여주는 일어나지 못했다. 뿌연 욕실의 공기만이 여린 여주를 숨겨주었다. 여주는 그 뜨끈한 공기에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렸다. 









그 다음날 여주는 윤기를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긴 웨이브 머리가 여주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체크무늬의 목도리를 감싼 후에서야 그나마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가까이 있는 윤기를 본 여주는 윤기를 말 없이 안았다.





"... 윤기야..."

"... 아. 누나, 실수야..."





하지만 윤기는 여주의 팔을 쳐냈다. 자신이 하고도 놀란 것인지 바로 다시 여주를 감싸안았다. 여주는 또 한 번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괜찮다고 윤기를 밀어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맺힌 눈물은 윤기에게 속수무책으로 드러났다. 수면 아래로 가라 앉지 못하고 위로 뜨기만 했다.





"누나..."

"... 너 조금 이상해."

"... 일단 어디라도 들어갈까."

"... 알았어."





윤기가 여주의 손을 꼭 잡고 걷자 여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평소처럼 말을 조잘조잘 꺼내기 시작했다. 금세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여주에 윤기의 긴장이 풀렸다. 밥을 먹고, 카페를 가는 순간까지 평소와 똑같이 흘러갔다.





"윤기야. 봄은 언제 올까?"

"글쎄. 그건 왜?"

"겨울은.. 너무 차갑고 외로워."

"... 왜 그렇게 생각해?"

"공기도 차갑고, 하늘도 쓸쓸해. 밤이 되면 더 그래. 끝없이 깜깜한 하늘. 나는 늘 그런 겨울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해."

"

"그래서 나는 따뜻한 봄이 좋아. 겨울이랑 다르게."





그 겨울밤 하늘 아래에서 여주는 입김을 불어내며 윤기의 손을 꼭 쥘 뿐이었다. 하얗게 몽골몽골 올라오는 입김 사이로 여주의 겨울은 깊어져갔다.














"오늘 재밌었어 윤기야. 또 언제 시간 돼?"

"수요일 학교 끝나고 뒤로는 시간 비어. 그때 볼까?"

"좋아. 새로 개봉한 영화 재밌대. 보고 윤기 좋아하는 해산물 먹자."

"좋아. 수요일에 보자."





윤기가 볼과 코끝이 빨개진 여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가. 몸 따뜻하게 녹이고 자. 응. 윤기 너도. 여주는 윤기에게 손을 흔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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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윤기가 여주네 집 옆 담벼락에 기대어 오른쪽 주머니에 뒀던 담배갑을 만지작거렸다. 라이터가 없네. 허전한 왼쪽 주머니에도 손을 꽂고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