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잔상에게

05. 래아 (1)




래아가 아스테룸에 온 지 닷새가 지났다.


칼리고가 아스테룸을 휩쓸고 간 지도 닷새가 됐다는 말이었다.



멤버들은 차근차근 아스테룸 보수를 시작했다.


일부 급한 부분은 노아가 마법으로 복구했지만 대부분의 큰 타격을 입은 곳들은 플리들의 사랑이 반드시 필요했다.



때문에 플레이브 멤버들은 거의 매일 방송을 진행했다.


컨디션을 고려해서 돌아가며 꾸준히 테라와 소통했지만 아스테룸이 모두 고쳐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칼리고들이 다녀간 하민의 위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민은 방송이 없는 날이면 시스템을 복구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밤 늦게까지 시스템 복구를 하고 아지트로 오면 늘 복도에서 래아를 마주쳤다.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늦은 시간에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균열을 닫겠다며 나간 래아를 찾아 돌아온 날, 역시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까지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모두가 궁금해 했지만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은호만은 그런 래아를 아랑곳하지 않고 쫓아다녔다.


지나간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래아! 사이버펑크에 가본 적 있어?"



순진한 얼굴로 웃으며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은호를 래아는 결코 귀찮아하지 않았다.


평소엔 늘 무뚝뚝하던 얼굴도 그와 함께라면 편하게 풀어지곤 했다.



"아니, 없어. 가보고 싶긴 했지."



"아스테룸이 다 고쳐지면 내가 지내던 곳으로 데려가 줄게. 사이버펑크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생겼거든!"



"그래. 네 집도 구경 시켜줘.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당연하지! 우리 집에 오면 내가 파스타도 맛있게 해줄게. 아마 너무 맛있어서 여기서 살고 싶어질 걸?"



은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자 래아도 따라 웃었다.




건너편 소파에 앉아있던 하민은 그런 래아가 신기했다.


지금의 그녀는 며칠 전 큐브 공간에서 봤을 때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역시 은호의 힘인 걸까?


은호라면 래아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고 있지 않을까.






*--*--*--*--*--*--*--*--*--*





밤이 깊어지고 아스테룸의 거리가 어둠으로 물들 때 쯤.


이 날도 하민은 늦게 까지 위성에 있다 지친 몸으로 아지트로 돌아왔다.


터덜터덜 달빛만이 비치는 깜깜한 복도를 걷고 있으면 둔탁한 발소리만이 천장에 닿아 울려 퍼지곤 했다.


복도가 그리 길지 않은데도 이토록 문이 멀게만 느껴지는 건 조용히 가라앉은 고요함 때문이었다.




그 복도 맞은편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었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와서는 늘 말없이 옆을 지나쳐 어디론가 가버리는 사람.


대체 무어라 말을 건내야 좋을까.





그 날 그런 래아의 모습을 본 뒤로 둘은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도 어색해질 것 같았기에 하민은 나오는 말을 삼키곤 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더 위성 복구에 매달려도 봤지만 보란 듯이 매일 마주치는 탓에 마음대로 떨쳐내지도 못했다.



다섯 명 밖에 없던 아스테룸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건 눈길을 끌만한 사건이기는 했다.


하지만 하민이 래아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단지 그 탓은 아니었다.





"래아씨."



한참의 고민을 마친 하민은 한 두 걸음 거리만큼 가까워진 래아를 불러 세웠다.


다행히도 래아는 하민의 부름에 걸음을 멈춰주었다.


천천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호박색 눈동자를 막상 마주하자 어쩐지 목이 메어오는 듯 했다.


어째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이리도 말문이 막히는지 스스로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오늘도 나가시네요."


"응."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봐도 돼요?"



하민은 조심스레 물으면서도 실은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여태 무엇 하나 제대로 말해준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균열을 보러 가."


"왜요?"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래아는 생각보다 시원스레 답을 내놓았다.


하민은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닫을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 닫는 방법을 아시는 줄 알았어요."


"알았으면 진작에 닫았을 거야. 너희에게 알릴 필요도 없었겠지."



또 다시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말을 하며 자신의 눈을 피하는 래아에게 하민은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토록 중요한 일을 상의도 하지 않겠다니.


심지어 은호 형과도.




왜 이 사람은 이토록 차가운 지, 혼자 모든 걸 해결하려 하는 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이해해보려 해도 일방적인 태도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민은 새어 나오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왜 그렇게 까지 우리를 못 믿는 거에요?"




래아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저도 모르게 살짝 찡그린 하민의 눈썹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짙은 흑빛을 띄는 눈동자는 곧게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를 못 믿는 게 아니야. 오히려 믿으니까 그러는 거야. 넌..."



돌연 래아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울음을 참고 있는 중인지 화를 삭히는 중인지 알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민이 찡그린 이마를 풀고 그녀의 기분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건... 너희의 안전이야."


"그럼 좀 더 설명해줬으면 해요. 래아씨를 이해할 수 있게요."


"이해 못해도 괜찮아."


"저는 괜찮지 않아요."




곧게 응시하는 하민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으면 점점 더 거짓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냥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너와 나 모두를 다치게 하겠지.



래아가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에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



그렇게 래아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민은 하는 수 없이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우선은 충분해.




"오늘도 균열을 보러 가는 거에요?"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하민이 일상적인 질문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하지만 어쩐지 래아의 얼굴은 더 굳어지기만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다른 곳에 가야겠어."


"큐브 공간요?"



래아의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졌다.


다행히도 래아의 분위기가 전보다 조금 편안해지는 게 느껴졌다.


덩달아 긴장되어 힘이 들어가있던 하민의 몸도 조금 풀어졌다.



"...응."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지금이라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큐브 공간에는 어떻게 간 거에요?"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래아의 입술은 또다시 굳게 닫혔다.



그렇게 하민이 체념하려던 찰나,



"...나도 거기서 깨어났거든."



래아가 하민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