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잔상에게

06. 래아 (2)

하민의 의아한 표정을 읽은 래아가 마저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야. 네가 큐브에서 이유도 모른 채 깨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랬어."

 

"하지만 개발자는 내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스스로 큐브에서 깨어난 캐릭터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을 알고 있었다면 제게 알려줬을 텐데.."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또다시 래아가 선을 긋고 한 발 물러섰다.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라는 건 말해주지 않은 더 많은 정보가 있다는 얘기였다.

 

 

".. 그럼 이만 가볼게."

 

"네."

 

 

개운치 못한 마무리였지만 별 수 없이 하민은 인내심을 기르기로 했다. 적어도 하룻밤 동안은.

 

 

 

-

 

 

 

 

고요하고 광활한 큐브 공간의 제대로 된 명칭은 사실 생명의 공간. 생명이 깃든 큐브들이 가득 찬 공간이기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하지만 하민이 깨어나기 전까지 래아는 이 곳에서 단 한톨의 온기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차가운 큐브들을 보고 있으면 목을 조여 오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었다.


보이는 거 라곤 큐브들, 깊이도 너비도 알 수 없는 끝없는 공간, 어디서 온 지 알 길이 없는 안개 무리 그리고 하늘에 보이는 별과 균열 뿐. 사람도 동물도 시간도 날씨도 구름도 존재하지 않는 어둡고 외로운 곳.


징그럽도록 오래 있었기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았지만 슬프게도 동시에 소중한 곳이기도 했다.

 


 

래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발걸음을 옮겨 큐브의 가장자리에 가 섰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전보다 훨씬 커진 균열이 뒤덮고 있어 거대한 은하수처럼 보였다.


아스테룸 복구를 위해 며칠 간 테라와 활발하게 소통한 탓에 균열은 매우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 더 커진다면 하늘과 균열의 경계조차 알 수 없게 될 테지.


그렇게 잠깐 동안 균열을 노려보던 래아가 정면을 보며 손바닥이 위로 보이게 내밀었다.

 

 

"이봐. 지금 있어?"

 

 

래아가 허공에 대고 말하자 펼친 손바닥 위에 네모난 창이 떠올라 내용이 그대로 적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래에 무언가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만.'

 

 

그대로 몇 분을 기다리자 이어지는 내용이 나타났다.

 

 

'하민이는 괜찮아, 아직은.' 

 

"그래. 고마워."

 

'하지만 더 조심하는 게 좋아.'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글씨를 바라보던 래아의 눈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알아."

 

'그래.'

 

"다른 방법은... 아직 못 찾은 거야?"

 

'미안.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그 부분은 뒤로 미뤄두고 있어.'

 

"사과할 필요 없어, 난..."

 

 

래아가 시선을 떨구며 떨리는 눈썹이 조금 구겨졌다. 입술을 꾹 다물고 크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은 숨에 고통이 번졌다.

 

 

"얼마든 더 기다릴 수 있어."

 

 

상대가 말을 고르는 듯 수초 간 대화 창에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 계속해서 썼다 지웠다 하는 흔적만이 깜빡거리며 기다림을 암시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거야. 널 위해서.'

 

"...그만 갈게."

 

 

래아가 펼친 손바닥을 강하게 움켜쥐자 대화 창이 픽셀 조각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동시에 큐브 공간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으나 래아의 머릿속은 그렇지 못했다.

 

 

 

 

'..알아... 안다고...'

 

 

 

 

 

-

 

 

 

 

다음 날 저녁, 아스테룸의 복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언제 칼리고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점만 잊는다면 전과 다름없이 평화롭다고 믿어도 될 정도였다. 막 해가 수평선 아래로 져 하늘은 푸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이제 각자 자기 집에서 자도 되겠다."

 

"어우 그러게요, 드디어."

 

 

은호가 팔을 벌리더니 힘껏 기지개를 켰다. 약 열흘 간 거의 쉬지 못했던 멤버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모두 내일 하루는 맘 놓고 쉬기로 합의했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은호에게 피곤해 보이는 밤비가 특유의 퉁명스런 말투로 말했다.

 

 

"내일은 보지 말자 진짜. 연락 하기만해 아주."

 

"아, 형이야 말로 저 보고 싶다고 연락하지 마세요 제발."

 

 

또 투닥대는 둘을 보고 노아가 기분 좋게 웃었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누구 하나 짜증 내는 이는 없었다.

 

 

"다들 수고 많았어. 내일은 푹 쉬고 모레 모이자."

 

"수고 많으셨어요 형들!"

 

 

예준과 하민이 경쾌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마무리지었다. 가볍게 끝인사를 나누고 노아와 밤비, 예준이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은호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형, 뭐 찾으세요?"

 

"응.. 래아가 어디 있는 지 모르겠네. 혹시 오늘 만난 적 있어?"

 

"아뇨."

 

 

하민은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래아를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침이 되어도 아지트에 돌아오지 않아서 오늘은 종일 그녀를 본 사람이 없었다. 하민의 대답을 듣고 은호의 얼굴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쉽네, 쉴 때 사이버펑크 구경 시켜주려고 했는데."

 

 

"아직 각자 집으로 돌아간 걸 모를 테니까 나중에 아지트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러네. 오늘은 아지트에서 자야겠다. 모레 보자 하민아!"

 

 

은호까지 아지트로 출발하자 어스름이 해가 진 아스테룸의 거리엔 하민만이 남았다.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하민은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터치해 큐브 공간의 위성으로 워프했다. 위성의 시스템 복구는 어제 부로 이미 끝난 상태였다.

 


위성 내부는 스크린을 제외한 곳이 대부분 흰색, 회색, 검은색 등의 무채색 투성이에 인공적인 빛이 더해져 그 분위기가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


하민은 워프실의 문을 열고 나가 테라에서 줄곧 우주선 내부로 상상하곤 하는 그런 모습의 복도를 지나 주로 지내는 중앙 제어실 문 앞에 섰다.

 


문을 열기 위해 터치 패널에 손을 대기 직전 하민은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제어실 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면 한 명 뿐이니 누구일지는 정해져 있었다. 하민은 긴장을 풀고 곧장 터치 패널에 손을 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벌컥 열어 젖힌 문의 건너편에는 짐작과 달리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패널을 조작하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기에 자신의 착각일 리는 없었다.


하민은 그리 넓지 않은 제어실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누군가 숨을만한 공간은 딱히 없었기에 수색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하민은 허리를 조금 숙여 메인 컴퓨터의 패널을 조작해 스크린을 띄웠다. 화면에는 무언가를 찾다 미처 닫지 못한 걸로 보이는 창이 몇 개 켜져 있었다.

 

정말 수상하기 그지 없었다. 위성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둔 것도 아니었고, 컴퓨터를 사용 중에 하민이 들어온다면 그대로 마주쳐도 상관없었을 텐데 이렇게 급하게 워프 해버리다니.


하물며 자신 몰래 뭔가 하려고 했다기에는 증거 인멸이 너무 허술했다.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찝찝함이 완전히 가시기에는 모자랐다.



하민은 조금 더 주위를 둘러본 뒤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자리에 앉아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래아가 남겨두고 간 자료들이 띄워져 있었다.


균열에 대한 기록, 카엘룸의 의지와 아스테룸의 역사, 그리고 '유하민'에 대한 상세 데이터.

 

 

"아직 방법을 못 찾았나보네."

 

 

하민의 데이터 기록을 제외한 대부분은 균열을 닫을 방법을 조사 중이었다는 게 빤히 보이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내 기록은 왜..?


심지어 일반적인 정보가 아니라 데이터 손상 기록이나 워프 기록 등 균열이나 테라와의 소통 활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록들만 열람되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긁어 모아 본 며칠간의 검색 기록도 의문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시스템이 망가졌던 기간의 기록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고작 어젯밤부터 방금 전까지의 기록만 남아 있었는데 그 마저도 죄다 균열의 생성 시기, 생성 원인, 균열의 힘과 역할 등에 관한 것들 뿐이었다.

 


하민은 만약을 위해 래아가 살펴본 자료들을 스크랩 해 따로 목록을 만들어 보안 폴더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목록에 있는 자료들을 하나씩 꺼내어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균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는 아직 까지 별로 찾지 못했기 때문에 컴퓨터에 존재하는 균열에 대한 자료들은 대부분 하민이 주관적으로 작성한 것들이었다.


웬만하면 래아를 포함해 멤버들까지도 모두 알 법한 내용들이었고 꼼꼼히 살펴보아도 역시나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한 하민은 우선 원래 위성에 온 목적이었던 조사를 시작했다.


실은 하민이 조사하려는 것들도 래아가 찾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카엘룸과 아스테룸, 균열을 포함해서 이 우주를 전반적으로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특히 균열은 테라와 소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기에 전에도 그 기원과 본질, 영향력 등에 대해 알아 보려고도 했었지만 거의 알아낸 것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아스테룸을 창조하고 자신들을 도운 개발자조차도 균열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 못했다. 단지 시간이나 공간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영향을 준다고 추측만 하고 있을 뿐.


아직 균열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그걸 닫니 마니 하는 얘기는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뒤지고도 아무런 유의미한 정보도 얻지 못한 하민은 피곤한 듯 눈을 부비곤 양팔을 벌려 기지개를 켰다.


밤을 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는 슬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띄워둔 창들을 끄고 시스템을 종료하려고 했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기 직전, 문득 아까 만들어 둔 보안 폴더가 눈에 들어왔다.

 

 

'래아..'

 

 

그 사람이 여기에 왔었지.


지난 9일 동안 본 래아는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악의가 있거나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평소엔 차분하다가 균열 이야기에는 예민해진다는 점이 그녀를 수상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거기다 자신의 이야기는 일절 하지도 않고 은호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했다.


성격의 문제라기 보다는 늘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느낌.


그러면서도 어쩌다가 마주치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

 

 


[ SEARCH : 서래아 ]

 

 


하민은 검색 칸에 래아의 이름을 써두고는 잠시 고민했다.


남의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함부로 보는 건 무례한 일이라며 그러면 안된다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하민을 멈춰 세웠다.


이 사람에 대해 궁금하다고 해서 이렇게 멋대로 정보를 찾아봐도 되는 걸까?

 

 


'..대략적인 내용만 보자. 언제 큐브에서 깨어난 건지, 그 이후에는 어디에 있었는지 만이라도 알아야겠어.'

 

 


평소라면 이런 결정은 자고 일어나서 맑은 정신일 때로 미뤘을텐데, 지금의 하민은 왠지 당장 뭐라도 알아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