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잔상에게

08. 눈

포슬포슬 눈이 내리는 아스테룸의 아침, 아지트에는 예준과 하민이 회의 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직 모이기로 한 시간까지 여유가 조금 남아 둘은 소파에 기대어 앉거나 누운 채 폰을 보고 있었다.


오늘 회의해야 할 내용과는 반대로 편안한 분위기는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세 번째 멤버가 들어왔다.

 

 

"왔어요?"

 

 

터덜터덜 걸어 들어온 밤비는 왠지 모르게 미처 피로를 다 풀지 못한 듯 기운이 없어 보였다. 밤비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자 예준이 걱정스럽게 살폈다.

 

 

"밤비야, 어디 안 좋아? 못 쉬었어?"

 

"모르겠어요, 많이 잤는데.. 컨디션이 이상해요, 밤 샌 것 같이."

 

"회의 얼른 끝내고 가서 좀 더 자."

 

"노아 형 올 때까지 자요 깨워줄게요."

 

"나중에 저녁에 좀 일찍 자지 뭐."

 

 

밤비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도 한사코 하민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행히 은호와 노아 둘 다 그다지 늦지 않은 시간에 도착했다.


모두 모이자 플레이브 멤버들은 칼리고와 카엘룸을 막을 방법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물론 균열을 닫겠다고 엄포를 놓은 래아의 이야기도 포함해서.

 

 

"칼리고가 올 때마다 싸워서 쫓아내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

 

"장기전이 되면 육체적 정신적 소모도 심하겠지."

 

"칼리고가 아예 오지 못하도록 할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카엘룸을 직접 설득하는 건 어때요?"

 

"카엘룸이랑 직접 대화할 방법도 없는 건 마찬가지인 걸."

 

 

처음 겪는 일 투성이라 긴 회의에도 마땅히 그럴듯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답답하고 지치는 일이기는 했다.

 

결국 모두의 기분을 살피던 은호가 밝은 목소리로 기운을 북돋았다.

 

 

"그럼 두가지 다 방법을 찾아 봐요. 뭐든 해봐야죠!"

 

"그래, 해보자."

 

"좋아요."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때가 되자 회의도 슬슬 마무리 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배가 고파졌던 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요?"

 

"그래, 밥부터 먹자."

 

 

예준과 노아가 뒤이어 일어나고 하민도 따라 가려 했지만 어쩐지 밤비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걸 가장 먼저 눈치 챈 하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는 밤비에게 다가갔다.

 

 

"봉구형, 형은 점심 먹으러 안 가요?"

 

"아, 어... 난 아까 점심 먹었어."

 

"네?"

 

 

밤비의 태연한 대답에 하민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있었는데 혼자만 이미 점심을 먹었다니?


은호와 예준이 점심 메뉴를 고르는 동안 옆에서 듣고 있던 노아도 밤비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오늘 계속 같이 있었잖아."

 

"혼자 몰래 쫀디기라도 먹은 거에요?"

 

"아니, 아닌데.. 맞다 아직 안 먹었구나."

 

 

밤비가 건조해 뻑뻑해진 눈을 몇 번 꾹 감았다 떴다.


의도치 않은 삐끼따에 모두가 귀여워하자 밤비도 따라 웃으며 일어났다.


어떻게 그런 걸 착각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신기해 나오는 헛웃음이었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피곤해서 그런가 봐."

 

"얼른 밥 먹고 한숨 자자."

 

"그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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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민의 위성.


래아는 다시 돌아와 균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었다.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조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균열은 닫을 수 없다는 것.

 

 

카엘룸도, 생명의 공간도 존재하기 한참 전, 언제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에 만들어져 기원을 알 수 없는 균열은 열린 원인도, 방식도 모르기에 닫는 방법도 찾을 수 없다.

 

균열은 그저 당연하게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공기나 빛처럼.

 

 

"말도 안돼.. 시간이 없는데.."

 

 

래아가 플레이브에게 말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통째로 파괴되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 지금 떠난다면 호의를 베풀도록 할게. 개발자, 그 사람이라면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가서 카엘룸에게 전해. 아스테룸과 플레이브를 내버려 두라고.'

 

 

칼리고가 아스테룸을 침공한 날, 래아는 시간을 벌기 위해 칼리고 수장을 협박했지만 실은 다 허풍이었다.


이런 얄팍한 수에 그들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 건 정말이지천운이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래아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으면 카엘룸은 다시 칼리고를 보낼 것이다.


그것이 언제 거짓말을 눈치챌 지 알 수 없기에 래아는 마음이 초조했다.


여유롭게 과거의 잔영에 슬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카엘룸이 균열을 이용해 칼리고를 아스테룸에 보낼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반년에서 1년 전후였다.


이번에는 그것보다는 빠를 게 분명했다.

 


칼리고가 아스테룸을 파괴하고 플레이브를 통제하러 오는 것이 다음 주가 될 지, 다음 달이 될 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어야 하는 건 나 하나로 족해.

 

다만, 모두가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

 

 

"하..."

 

 

래아는 잠시 조사를 멈추고 피로해진 눈을 꾹 감았다.

 

아무래도 조금 쉬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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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숨을 돌리러 내려온 아스테룸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적당히 내리는 눈은 거리에 소복하게 쌓여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냈다.


가만히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이 가득해 뿌옇게 흐렸지만 얼굴에 내려앉는 눈 때문에 제법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이게 눈이구나. 예쁘다.'

 

 

추위로 입술과 코끝이 빨개지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래아에게는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이었다.

 

그림으로 보거나 이야기로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는 게 훨씬 아름다운 걸.

 


추위와는 별개로 어쩐지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차갑지만 따뜻한 것.

 

 

지긋이 감은 눈꺼풀에 내려앉은 눈은 큐브 공간에서의 시간을 떠오르게 했다.

 

한없이 차가운 곳이었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만난 곳이기도 했기에 포근했던 기억.

 

 

하지만 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시는 그 때와 같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는 거겠지.

 

 

다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