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태어나는 순간 카엘룸이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참 다행스럽게도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내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같은 존재론 적 방황을 할 필요도 없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이 인간이며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며 걷고 움직여야 하는 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내게 저주와도 같았다.
이 곳에서 눈을 뜬 순간 절대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란 걸 알아버렸으니.
아니면 오히려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생명의 공간.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태어났었지만 테라인의 관심을 잃고 소멸된 캐릭터들이 큐브 형태로 잠들어 있는 곳.
생기 넘칠 것 같은 이름과는 다르게 이 곳은 햇빛도 바람도 심지어는 먼지조차도 없는 어둡고 황량한 곳이었다.
나갈 수 없다면 하다 못해 여흥 거리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보이는 거 라곤 별도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과 작은 균열, 제각각의 크기를 가진 큐브들 뿐.
나도 한때는 저들처럼 무엇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큐브 안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애매한 상태로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홀로 무언가를 견디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어두운 곳에서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는 일은 점점 나를 좀먹어왔다.
가끔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입술과 혀가 딱 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발소리와 숨소리, 옷이 스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를 들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보고자 뛰어도 보고 큐브들을 염력으로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고 노래도 해봤지만 전부 그저 아주 잠깐 동안만 현실을 잊을 수 있었을 뿐,
조금이라도 숨을 돌리면 금세 무거운 침묵이 목을 조여왔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늘어가다 끝내는 눈을 감고 누워 그저 존재만 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빠지직-'
근처 어디선가 낯선 파열음이 들려왔다.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소음.
처음엔 내가 드디어 미쳐 헛것을 듣게 됐나, 혹은 내 두개골이 갈라지기라도 한 걸까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만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소음이 다시 들려왔다.
'빠직-'
결국 나는 그 무시하기 힘든 소음의 근원을 찾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으로 무언가를 디디는 것이 어색해 걷다가 낮게 떠다니다가 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쫓았다.
그 소리는 몇 발자국 가면 있는 한 큐브에서 들리고 있었다.
한참을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꽤나 큰 큐브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큐브는 남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표면 이곳저곳이 갈라져 틈 사이로 은은한 녹색 빛이 예쁘게 비쳐 보였다.
'빠지직-'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자 큐브는 다시 새로운 틈을 만들어냈다.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려는 걸까? 예전의 나처럼?
나는 기대와 설렘을 안고 큐브를 바라보다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분명히 차갑지만 어딘가 따스한 느낌.
손바닥 너머로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양 손을 모두 큐브에 올린 채 귀를 가져다 대었다.
이상하게도 누군가를 껴안고 있는 것만 같은 포근한 감각에 나는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빠직-'
큐브에 틈은 계속해서 늘어갔고 나는 그것이 스스로 깨어나길 잠자코 기다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한참을 곁에서 졸다 깨기를 반복했지만 큐브가 깨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안에서 깨고 나오기에는 힘이 충분치 않은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큐브를 직접 열어보기로 결심했다.
안에서 무엇이, 혹은 누가 나오든 적어도 혼자인 지금보다는 낫겠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갑갑한 감옥에 최소한 새로운 변화가 생길 테니까.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게 내 전문이라는 건 운이 좋은 일이었다.
결심을 굳혔으니 더 고민할 것 없이 큐브 표면에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염력을 흘려보냈다.
내 힘은 큐브의 틈새로 금세 퍼져나갔지만 처음엔 껍질을 깨지 못하고 겉을 맴돌기만 하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는 영영 큐브를 깰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큐브의 중심으로 압박하듯 힘을 모아 방출했다.
그러자 드디어 틈새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확신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기쁘게도 효과가 있었다.
지쳐서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큐브가 진동하며 밝은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어 손을 떼고 눈 앞을 가린 채 뒤로 물러서자 마침내 큐브는 수백 개의 조각으로 터지듯 흩어졌다.
점차 빛이 잦아들기 시작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가린 손을 내리자 한 사람이 보였다.
큐브 안에서 나타난 건 온통 검은색인 옷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과 어두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한 남자였다.
키는 매우 컸지만 얼굴은 어쩐지 나보다도 조금 앳되어 보였다.
두둥실 떠올라 있던 그가 제 다리로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천천히 눈을 뜨더니 몇 번 깜빡 거리며 생경한 듯 자신의 손과 발을 살폈다.
이렇게 까지 누군가가 반가웠던 일이 있었던 가?
몸도 마음도 떨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주먹을 꽉 쥐고 최대한 진정하려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려 가슴이 가빠오고 나서야 나는 겨우 작은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낀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처음으로 마주 본 순간.
그때 이 모든 일이 시작됐다.
"안녕."
그가 바로 유하민, 너였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