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잔상에게

10. 우연한 안부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쌓인 눈은 아스테룸을 한층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머잖아 녹아버릴 거라는 것도 잊을 수 있을 만큼.


조용한 도시의 거리와 적당히 추운 날씨는 괜히 고민을 더 깊어지게 만드는 듯 했다.

 



요 며칠 하민의 머릿속은 정리하지 못한 정보와 생각, 마음들로 어질러져 있는 상태였다.


자기 전 누웠을 때 찬찬히 정리해보려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래아의 태도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따금 스치듯 자신을 할 말이 있는 눈으로 바라보곤 했지만 막상 다가가려 하면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버리는 게 하민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하민아, 괜찮아?"

 

"아, 네.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이 났어요."

 

 


밤비가 멍하니 앞만 바라보며 걷던 하민을 확인했다.


그가 이렇게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도 홀로 딴 생각에 잠겨 있는 경우는 드물어서 걱정이 있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 스스로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굳이 억지로 물어 캐내고 싶지는 않아서 밤비는 그저 옆에서 함께 걷기로 했다.

 

 


"형이야 말로 괜찮아요?"

 

"어, 아니... 어."

 

 


대답을 머뭇거리다 뭔가를 발견한 듯 멈춰 선 밤비의 시선 끝을 따라가자 그 곳엔 내리는 눈 속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서 있는 래아가 있었다.


하민은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날, 밤비는 주저앉아 있어 도운 그 날 이후 래아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

 

 


흰 눈과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따라 등까지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모습은 어쩐지 신비로워 보였다.


은호와는 반대로, 귀 뒤쪽부터 아래로 이어져 있는 은빛 머리칼은 그녀가 자신과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했다.


쓸쓸해 보이는 옆모습은 생명의 공간에서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혼자서 긴 시간을 외롭게 보냈겠구나, 나처럼.


하지만 어째서 아스테룸에 와 우리와 함께 있는 지금도 여전히 외로워 보이는 걸까.

 



하민은 저도 모르게 래아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걸 본 밤비가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둘은 얼떨결에 래아에게로 걸어 가게 됐다.


하민은 조금 당황했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밤비형과 함께라면 래아가 제게서 도망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두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감은 눈의 속눈썹도 잘 보일 만큼 가까이 왔지만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래아는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래아씨."

 

 


결국 먼저 입을 연 하민의 목소리에 래아가 눈을 뜨고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는 달리 래아는 금방 하민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리곤 의식적으로 밤비 쪽을 보고 있는 게 느껴지자 하민은 씁쓸한 기분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래아는 말 없이 지긋이 둘을 바라보기만 했다.


용건이 있다면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민은 마치 외면하듯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래아에게 쉽게 첫마디를 뗄 수가 없었다.

 

 


"래아씨 눈, 좋아하시나봐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결국 참다 못한 밤비가 멋쩍게 말을 꺼냈다.

 

 


"잘 모르겠어. 오늘 처음 보는 거라."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어요?"

 

"응. 그림이나 영상으로는 봤지만."

 

"더운 지방에 사셨나봐요."

 

"그냥... 연구소에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어."

 

"아."

 

 

괜히 물었다.


정말이지 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밤비가 다음 말을 찾는 사이 옆에서 듣고 있던 하민이 뜻하지 않게 울적한 분위기가 될까 얼른 말을 돌렸다.

 

 


"직접 보니 어때요, 예쁘죠?"

 

 


그제야 래아가 하민을 똑바로 봐 주었다.

 

 


"응, 정말 예뻐."

 

 


그렇게 말하며 래아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하민이 래아의 웃는 얼굴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웃어준 것은 처음이었다.


이상하게도 하민은 전보다 래아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 미소 때문일까.


그런 래아를 보며 그도 같이 살며시 웃었다.

 



잠시 대화가 멈춘 사이 밤비가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했다.


둘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하품을 끝낸 밤비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하.. 미안."

 

"제가 죄송해요. 형 얼른 집에 가셔야 되는데."

 

 


그런 밤비를 보는 래아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지는 것을 두 사람은 미처 보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먼저 가볼게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밤비가 대화의 마무리를 지었다.


래아는 그를 똑바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만에 만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하민은 어쩔 수 없이 밤비의 뒤를 따라 발을 뗐다.



정확히는 발을 떼려고 했다.


래아가 말로 그를 붙잡기 전까지는.

 

 


"잠깐 얘기 좀 해."

 

 

 


 

-----------------------------

 

 

 

 

겨울 아스테룸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키면 놀라 뛰던 심장도 진정되는 듯 했다.

 

래아가 먼저 대화를 요청한 건 하민에게는 굉장히 뜻밖의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명 물어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턱 끝까지 차올랐던 말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달아나 백지장이 되었다.

 


 

"괜찮아요?"

 

 


이야기하자고 자신을 붙잡아 두곤 눈으로 멀어지는 밤비의 뒷모습을 쫓는 래아가 신경 쓰여 초조해진 탓에 하민은 아무런 말이나 내뱉어 버렸다.


앞, 뒤 모두 생략 된 뜬금없는 말이었다.


뱉어 놓고 대체 뭐가 괜찮냐고 물은 건지 뒤늦게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


그냥.. 괜찮아 보이지가 않아서 였던 것 같아.

 


하민의 돌발적인 질문에 래아는 고개를 돌려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과 말들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괜찮아야지."

 

 


래아는 애써 괜찮다 거짓말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괜찮지 않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괜찮아야 한다.. 괜찮아야 해.


적어도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래아는 더이상 이 이야기가 길어져선 안된다는 걸 알기에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혹시 최근에 밤비에게 무슨 일 있었어?"

 

 


래아가 꺼낸 이야기는 하민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실망감이 가슴에 스며왔지만 하민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그냥... 잠을 푹 잤는데도 밤 샌 것처럼 피곤하다고 하더라구요. 점심 먹었는지도 헷갈릴 만큼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았어요."

 

 


별 거 아닌 이야기였지만 하민의 말을 들은 래아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쩐지 주변의 공기가 무럽게 내려 앉은 느낌마저 들었다.

 

 


"..뭔가 심각한 일인 거에요?"

 

"그럴 수도 있어, 확인 해봐야 알겠지만."

 

 


허공을 응시하는 래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하민은 조심스럽게 참고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이번 일도 제게 알려주실 수 없는 건가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래아가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자그만 서운함이 묻어난 검녹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그런 래아의 심정을 하민이 알 리가 없었다.

 


래아는 마음을 토해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다스렸다.


폭풍이 다 지나가고 나면 언젠가 바다도 다시 잠잠해지기 마련이니까.

 



"알아도 돼. ...밤비에게서 익숙한 흔적을 봤어. ...전에 본 적 있는 것과 비슷한 걸."

 

 


말을 마친 래아가 고통을 삼키듯 숨을 들이켰다.

 

괴로움에 일그러진 눈은 그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밤비가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