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가 위험해.'
그 말을 마친 래아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듯 허공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민의 말도 듣지 못하는 듯 보였다.
갈 곳 잃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 미세하게 떨고 있는 입술과 어깨, 꽉 쥔 주먹.
자세히 보지 않아도 래아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래아씨?"
하민의 부름에도 래아는 곧장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겨우 작게 숨을 내어 쉬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직은 괜찮을 거야. 흔적이 아주 작았으니까. 무슨 일인지 알아볼 시간은 있어."
"저도 도울게요."
"안돼."
단호하게 하민의 도움을 거절하면서도 래아의 시선은 줄곧 하민에게 닿아있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서 있는 모습은 또다시 자신을 멀리 밀어내는 듯 느껴졌다.
"이번 일은 특히나 너에게 가장 위험해. 대신에.. 밤비의 상태를 계속 살펴줘. 웬만하면 혼자 두지 말고."
"...알겠어요."
그러나 이번엔 래아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타일렀다. 하민은 조금이나마 위로 받는 기분을 느꼈다.
"칼리고와 관련이 있을까요?"
"아닐거야."
거기까지 말한 래아가 숨을 삼켰다.
"뭔가 알아내면 말해줄게. 그때까진 일단 모두에겐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으니까."
"그래도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알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내키는 대로 해."
그렇게 워프할 때까지 결국 래아는 하민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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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최대한 빨리 답신 해줘."
생명의 공간으로 온 래아는 곧장 개발자에게 연락했다.
당장 사태를 파악하려면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빨랐다.
지체하면 다시 예전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가만히 앉아 기다리길 몇 분이 지나고, 다행히 답은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밤비에게서 전과 비슷한 흔적을 봤어."
[뭐?]
"크기도 작고 생김새도 약간 달랐지만 느낌이 비슷해."
[밤비에게 능력을 사용한 거야?]
"딱 한 번, 아주 약하게. 살짝 들어서 옮기는 정도였어. 설마 그걸로도.."
정말 최대한 조심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일단은 최대한 빨리 밤비의 데이터를 진단할게.]
"서둘러줘."
[근데 너]
미완성된 문장이 개발자의 망설임을 보여주듯 한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래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돼.
[아니야 그냥... 무리는 하지 마.]
"그래."
주먹을 쥐어 대화 창을 닫은 래아는 꼭 쥔 자신의 주먹을 한참 바라봤다.
고요한 생명의 공간에 혼자 남겨지면 늘 옛 생각이 덮쳐왔다.
'래아!! 싫어요, 제발..!!'
'미안해... 미안해 하민아.'
'안돼!!'
날카로운 비명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붉게 물든 손과 울부짖는 그, 그리고 도망치는 나.
그 어떤 것도 도무지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기억들이 제멋대로 떠오를 때마다 야속하게도 심장은 언제나 그때로 돌아가 버렸다.
점점 숨은 가빠오고 시야는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 힘들어졌다.
가슴을 조이듯 몰려오는 통증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데려왔다.
하지만 괜찮아.
이 일만 지나가면 더는 슬프거나 아프지 않아도 돼.
그 애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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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의 집은 사이버펑크에서도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창밖만 보아도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은호는 이 풍경을 제법 좋아했다.
특히 밤의 사이버펑크는 항상 좋은 영감이 되어주곤 했다.
플리들의 사랑으로 아스테룸에 도시들이 하나, 둘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크로마 드리프트 속의 자신들의 도시도 생겨날 거라고 기대하게 되었을 때.
밤비는 자연스레 사이버펑크를 떠올렸지만 은호는 달랐다.
물론 아스테룸으로 오기 전까지 쭉 사이버펑크에 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한군데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
사이버펑크에서 꽤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외딴 숲 속에 있었던 곳.
은호는 삶의 절반 이상을 연구소 안에서 갇혀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시간은 대부분 나쁜 기억으로 남았다.
일부는 아직까지도 그에게 트라우마가 됐을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 속에서 그나마 과거를 의미 있게 만들어 줬던 건 테리와 래아 뿐이었다.
불행한 날들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이자 누구보다 소중했던, 제 모든 것.
그 곳을 탈출하면서 모두를 잃었을 때엔 아니, 잃었다고 생각하며 산 5년 여는 그토록 바라던 '자유' 와는 거리가 멀었다.
꾸역꾸역 삶을 이어나가면서도 속죄와 원망을 반복하며 닳아갔지만 속을 털어놓을 이도 없었다.
아스테룸으로 오고 믿음직하고 기댈 수 있는 형들이 생겼음에도 아직 은호는 누구에게도 연구소에서 탈출할 당시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밤비에게조차도 래아에 대해서 털어놓지 못했다.
테리와는 카엘룸에 오기 전에도 밤비와 함께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가 나쁜 길로 들어선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살아있기에 그걸로 됐다고 위안 삼을 수라도 있었는데.
하지만 래아는... 은호에게는 오랫동안 곪아 쓰린 상처로 남아있었다.
아스테룸으로 온 뒤로는 이제 그녀의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게 됐음에 괴로웠다.
이따금 멋대로 꿈에 나올 때면 사라지는 래아의 잔상을 보며 울부짖다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런데 그런 래아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아스테룸에.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봐도 자신이 알던 래아라는 걸 다시 확신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아스테룸으로 왔는 지는 은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이렇게 곁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이 의미 있을 뿐.

오늘처럼 종종 찾아와 자고 가는 날엔 마음이 복잡했다.
서운함과 미안함, 기쁨과 행복 그리고 여전한 그리움.
소파에서 새근새근 작은 숨을 쉬며 잠들어 있는 래아를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알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인 것만 같아 안심됐지만 동시에 다시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도 느껴졌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줘..."
은호는 허리를 숙여 래아의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런 손길로 넘겨주곤 낮게 속삭였다.
마치 간절한 소원을 빌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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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을 걷자 보이는 아스테룸의 하늘은 맑게 개어있었다.
사이버펑크 시티의 구석구석에는 어제 내렸던 눈들이 조금 남아있었다.
하민은 양팔을 들어 올려 힘껏 기지개를 켜곤 소파로 돌아가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밤비는 아직 자고 있는 지 열린 방 문 너머에서는 새근 거리는 숨소리만이 작게 들려왔다.
하민은 밤비를 지켜봐 달라는 래아의 부탁을 위해 전날 밤을 밤비의 집에서 보냈다.
래아의 말대로 아직은 이따금씩 대화의 순서를 헷갈리는 모습 외에는 눈에 띄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더더욱 이 일의 심각성이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래아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지만 사실 그 사람은 늘 그런 얼굴이니까..
어제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하민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이번 일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밤비 본인에게도.
우선은.. 래아의 결정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 일찍 일어났네."
방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밤비가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쏟아진 햇빛에 눈을 찡그리곤 크게 하품을 하는 모습은 그에게 닥친 상황과는 달리 한가롭기 그지 없었다.
"형, 잘 주무셨어요?"
"응 오늘은 좀 괜찮네. 너도 잘 잤어?"
"네. 소파 푹신하더라구요."
실은 오늘 새벽, 또 다시 그 꿈을 꾸고 깨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하민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엔 전보다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어 하지만..
아직은 그 빛에 닿으려면 멀었다는 걸 꿈에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깨어나면 대게 기억도 감각도 흐릿해지기 마련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꿈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때문에 그 꿈을 꾼 날이면 종일 기분이 찝찝했다.
"물 좀 마실래?"
"네. 감사.."
부엌으로 걸어가던 밤비가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하기 위해 돌아본 하민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거구나, 흔적이라는 게.'
밤비의 귀 뒤쪽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하게 금색으로 빛나는 조그만 자국이 보였다.
갈라진 틈 같은 모양새에 별무리처럼 보이는 빛이 겹쳐진 형상.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민아?"
"아, 네. 마실게요."
그래, 우선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래아가 가져올 소식이 무엇이건 간에 부디.. 별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