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됐으면 시작할게.”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아스테룸의 거리,
하민과 은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래아가 밤비의 오류를 고치는 것을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하늘이 맑고 구름이 적은 건 운이 좋은 일이었다.
어제처럼 눈구름으로 하늘이 가득 차 있었다면 개발자와의 연결이 불안정해질 수 있어 밤비의 치료를 미뤄야 했을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한 래아의 설명은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다.
모두가 알기로는 여태 아스테룸이나 카엘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치료 방법은 아직 없어. 지금 할 수 있는 조치는 밤비의 데이터를 흔적이 생기기 전의 것으로 덮어 씌우는 것 뿐이야. 이것도 임시라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는 말에 일의 경중을 살필 틈도 없이 치료를 도와줄 개발자와 다급하게 시간을 맞췄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들은 은호는 얼른 치료하러 갈 때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밤비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겠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동행의 이유에 다른 것이 있음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은호가 저리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걸 보면 단순한 오랜 친구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은호 자신이 인정하건 아니건 간에.
래아는 금방 치료를 시작할 듯 말을 내뱉어 놓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던 하민과 은호는 둘의 말소리나 표정도,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한 뼘 거리에 있던 밤비만이 그녀가 무언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자신의 어깨 너머 어딘 가를 응시하던 래아의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밤비는 불안한 래아의 시선을 살피다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래아?”
하지만 부름에도 시선은 제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해.”
“네? 뭐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과를 내뱉고 나서야 래아는 밤비의 눈을 마주했다.
올려다 본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어….”
“괜찮아요. 래아 탓도 아닌데…”
“아니, 맞아.”
“맞다구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밤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탓이야. …미안해.”
그제서야 밤비는 래아의 눈에 가득하던 것들이 죄책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일은 내가 반드시 해결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눈에 서린 죄책감이 다짐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곧 잊어버릴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밤비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래아가 양 손을 밤비의 양쪽 귀 위에 살며시 덮듯 올려뒀다.
아스테룸의 겨울 추위에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이 닿자 조금 차가웠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데이터 복구를 위한 통로를 연결하기 위해 네 머릿속에 내가 잠시 들어갈 거야. 느낌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참아줘. 네 마음을 엿보는 게 아니라 그저 뇌파를 연결하는 것 뿐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을 마친 래아는 밤비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곤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2분이 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래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심호흡 만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소란스럽게 하는 이 없이 밤 거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하민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은호는 입 모양으로 괜찮으니 조용히 기다리자며 안심 시켰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약 3분 여를 잠들 듯 말 듯 눈을 감고 있던 래아의 양 손에서 은은한 금색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차 선명해지며 몸집을 불린 빛무리는 물결을 만들어 밤비의 주변을 둘러싸고 천천히 유영했다.
곧 무언가가 부드럽게 머릿속을 감싸는 듯한 감각에 놀라 밤비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본 빛무리는 마치 아름다운 오로라나 성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별안간 흩어져 있던 빛이 그들에게로 모이더니 하늘로 솟아올라 마치 하늘의 균열과 밤비가 이어진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길었던 준비 시간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사그라들었다.
손 끝에 남았던 작은 빛마저 다 사라지고 나서야 래아는 눈을 뜨고 밤비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래아는 은호와 하민이 서 있는 쪽으로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끝났나 봐요.”
“가보자.”
둘이 발걸음을 조금 서두르는 동안 래아는 여전히 밤비의 곁에 서서 그를 살피고 있었다.
“어… 어…?”
그들이 자리가 도착할 즈음 밤비가 잠에서 깨어나듯 부스스한 눈을 떴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래아의 눈을 마주치자 당황해 엉성하게 발을 한 걸음 뒤로 내딛은 밤비의 어깨를 은호가 붙잡았다.
“형, 어때. 괜찮아?”
“어? 어. 그냥 잠깐 졸았어. 호들갑을 떨고 그래.”
“걱정을 해줘도 난리야.”
툴툴거리며 은호의 손을 떼어낸 밤비는 겉보기로는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귀 뒤쪽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치료가 성공했다고 믿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흔적이 없어졌어요.”
하민의 말에 래아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밤비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려다 갑자기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가까이 서 있던 하민이 반사적으로 래아의 등과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과 살짝 가쁜 숨, 약하게 떨리는 몸이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래아씨, 괜ㅊ…”
“…아…!!”
하지만 미처 걱정하기도 전에 래아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하민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좀 전의 안도감은 어디로 가고 또다시 알 수 없는 기우로 가득했다.
“아, 미안해요! 넘어지실 까봐 잡았어요.”
“…괜찮아. 사과할 필요 없어.”
당황한 하민이 사과를 쏟아내자 래아가 어쩐지 안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에 얼른 은호가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무리 한 거야?”
“아니, 괜찮아. 그냥, 이런 건 오랜만이라 조절이 힘들었어. 조금만 쉬면 돼."
래아는 조그만 컨디션 난조에도 금방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은호를 타이르기 위해 작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게도 은호는 그 말도 미소도 전혀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걱정스런 분위기를 만드는 건 모두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수고 많으셨어요, 래아씨. 얼른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겠어요.”
“쉬세요.”
밤비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래아를 걱정해줬다.
래아는 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은호에게 눈짓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특히 채봉구씨!”
휘청이지 않고 잘 걷고 있는 래아에게로 간 은호는 괜찮다는 말을 못들은 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얹었다.
은호가 무어라 말하자 래아가 편안한 얼굴로 웃으며 포기한 듯 그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하민아, 나도 가볼게.”
“데려다 드릴게요.”
“아이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같이 가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밤비를 툭 치던 하민은 곁눈질로 슬쩍 둘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낯선 사람의 손이 닿아서라고 하기에는 과하게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곧바로가 아니라 한 발 늦게 놀랐던 것도 그랬다.
하민은 걸으며 그때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하지는 않았는 지 여러 번 기억을 되감아봤지만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저 제발 언젠 가는 그녀가 속 시원히 말해 주기 만을 바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