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환승연애의 규칙을 설명드리겠습니다.”
거실 중앙에 모인 여덟 명.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도,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
여긴 친해지기 전에,
먼저 조심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걸.
“지금은,
나이와 직업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작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누가 누구의 X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심장이 조금 빨랐다.
환승연애.
헤어진 연인과 같은 공간에 머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프로그램.
솔직히 말하면,
여기 오기 전까지도 몇 번이나 취소할까 고민했다.
굳이 다시 마주치지 않아도 될 사람을,
굳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럼, 먼저 자유롭게 이야기 나눠주세요.”
제작진의 말이 끝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는 웃으며 말을 꺼냈고,
누군가는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여기 분위기… 생각보다 긴장되네요.”
누군가 조심스럽게 웃자
그제야 조금씩 공기가 풀렸다.
나는 시선을 돌리다,
자연스럽게 거실 한쪽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게 됐다.
말이 많지 않은 사람.
웃을 때도 소리가 크지 않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습관.
명재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얼굴.
그게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친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쪽은 그였다.
누군가 말을 건네면 대답은 하지만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슬쩍 빠져나가는 식.
특히 나와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
‘잘됐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야 서로 편하니까.
“혹시 환승연애 보면서
‘아, 난 절대 저런 데 못 나가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누군가 던진 질문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전 매번요.”
“저도요.”
그때, 재현이 짧게 말했다.
“근데 막상 오니까… 생각보다 다르네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다르다’는 게,
좋다는 건지
아니면 더 불편하다는 건지.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않았다.
보면, 예전이 떠오를 것 같아서.
밤이 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쥐고 있자
진동이 울렸다.
밤이 깊어지고,
각자 방으로 흩어진 뒤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데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오늘 당신을 설레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환승연애 특유의,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제일 잔인한 질문.
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설렜다기보다는,
신경 쓰였고
의식됐고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누를 수는 없었다.
이미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는 분명히
나를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이름 하나를 선택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짧은 문장.
예상했던 결과였는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내려앉았다.
‘그래, 이게 맞지.’
우리는 이미 끝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중이니까.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감으려 할수록
거실 한쪽에 앉아 있던 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던 눈빛.
말을 아끼던 목소리.
누굴 골랐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
우리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게 이 관계의 시작인지,
아니면 끝을 미루는 방식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 채로.
다음 화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