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첸초02 뫼비우스의 띠

w. 스몰낫t
그 날 이후의 삶은 뭐랄까, 좀 달랐다. 괜히 기분이 붕 떠서는 매일 밤 벽에다 짝대기를 하나씩 그었다. 어느새 '바를 정' 자는 두 개 하고도 세 획이나 더 그어져 있었다. 철저하던 현실주의자가 어느새 몽상가가 다 되어 있었다. 인형 눈을 붙이다가도 자꾸만 공상에 빠졌다. 동네에서는 더 이상 그를 냉철한 현실주의 꼬마 따위로 부르지 않았다.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그의 표정을 보며 의아한 마음에 궁금증만 증폭되었을 뿐.
그건 이 쪽도 마찬가지 사정이었다. 마피아 게임이란 말만 달랑 부가 설명 한 줄 없이 적어놓은 채로 끝이었다. 추신 따위를 기대했건만 이 주 가까이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나저나 뜬금없이 마피아 게임이라니. 생소한 이름은 아니었다만 딱히 즐겨하는 오락은 아니었다. 대략적인 진행 방식과 규칙 정도만 아주 간략히 인지한 상태였다. 또래한테 옛적에 들은 간단한 설명은 결코 구미를 당기지 못했는데 기회로 덕택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제서야 '마피아' 가 무얼 의미하는 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시초는 이탈리아 시칠리아라고 한다. 대부 밑에는 언더보스, 콘실리어리가 있고, 그 외에도 직급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했다. 동네 건달 무리가 파를 붙여가며 양아치 짓을 일삼는 것과 얼핏 흡사했다. 눈에 띄는 다른 점이라곤 그저 그럴싸한 명칭이 붙었고, 같잖은 파 대신 패밀리라는 정겨운 단어로 소속감을 강화했고, 또… 멋스러운 시계는 늘 왼쪽 손목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수금의 스케일이 어마무시했다는 것 정도. 좀 그럴싸한 건달무리, 나는 그렇게 정의내렸다.
마피아 게임은 그런 실질적인 마피아와는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였다. 이럴거면 마피아를 야쿠자로 바꾸어도 별반 논란거리가 될 듯 하진 않았다. 추측컨데 위와 같은 이유다. 야쿠자 게임 보다는 마피아 게임이 더 그럴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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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한달 후 어김없이 그 때와 같은 집배원이 동네를 기웃거렸다. 빨간 박스에는 곧 그의 응하겠다는 짤막한 답변이 적혀 있는 우편이 담길 예정이었다. 한 달 사이에는 소소한 변화가 있었지만 여느 한 달과 다를 바 없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하릴없이 방랑하다 어쩌다 나타난 구원에 삐끗하여 굴레를 탈출한 듯한 기분이었다. 날개가 달렸나 싶어 뒤를 돌아볼 정도로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곱게 짜여진 옷을 수거하러 온 사내들은 섬세하게 훑어 빈틈을 살폈다. 한 군데라도 사소한 흠집이 있으면 칼 같이 이건 아니라며 바닥에 내팽개치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반항은 커녕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평생 계약서 중 갑 란에 이름 적을 일 따위는 없는 집합이었다. 하루종일 굽은 어깨로 바느질만 한 노고의 대가는 처참했다. 고작 지폐 몇 장 손에 꼭 쥐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다정한 척 손에 쥐어주고 고생했다고 어깨를 다독여주어 봤자 허한 마음을 달래주기엔 미비했다.
똑닮은 유니폼을 입은 채 혀를 끌끌 차기 바쁜 사내들 중 하나가 그의 것 앞에 멈춰 섰다. 소매 안이며 목 뒷편까지 꼼꼼히 살피더니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어깨에 걸쳐 맸다. 그러다 버거운지 부하 직원 하나를 불러다 마음에 드는 것들로 콕 집어 가져가라고 시켰다. 참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었다.
다 챙겨가나 싶더니 마지막 것 하나를 남겨두고 갈팡질팡했다. 여러번 들춰 봐도 썩 성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옆에 있는 부하 직원은 가져가라는 허락이 떨어질 때 까지 한참이고 잠자코 서 있을 작정인 모양새였다. 깊은 고민의 신음이 귓바퀴에 맴돌았다. 고작해야 지폐 한 장도 안 되는 차이건만 괜히 숨죽인 채 초조했다.
"…….이거 말고 다 가져가."
한참의 장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보잘것없었다. 그의 눈에는 썩 괜찮아 보였는데 어찌 저리 냉랭하게도 구는지 도무지 속을 감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할수록 분했다. 바닥에 쓸쓸하게 버려진 옷 한 벌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그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 이 정도 흠집은 문제 안 될 것 같은데요……?"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늘 순종적이던 동네에서 처음으로 반문이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잠잠해진 고요 속에서 두어 척 앞서가버린 사내가 다시 뒤를 돌았다. 알싸한 긴장감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작지만 묵직한 파장이 일었다. 어디서든 최고만큼 인정받는 업적이 최초였으니까.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사내의 안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강자임을 강조하기 위에 그자는 부러 더 큰 소리를 내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보폭도 넓은 것이 눈 깜짝할 새에 앞에 와 서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피고 늘 안쪽으로 굽기만 하는 어깨도 최대한 펼쳐 봤자 날갯짓하는 닭이 태생이 우아한 백조를 이길 수 있을리 만무했다. 사내 앞에 서니 그저 한없이 왜소한 체구에 앙상한 마디만 부각되었다.
사내는 그 앞에 우뚝 멈춰 서더니 가지런하지 못하게 버려진 옷 한 벌로 한 번, 다시 그 앞으로 한 번, 총 두 번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어깨에도 닿을락말락 조그만 소년에 콧웃음을 쳤다. 상대도 아니라는 듯이 아주 가볍게 그렇게 웃어넘겼다.
"쪼그만 게……. 어른 말에 아주 따박따박. 어?"
"……."
"인마. 소비자를 생각해야지, 소비자를. 그렇게 대충 검수해가지고서야 좋은 평판을 얻겠어? 못 배운 거 티 내기는."
그리곤 안 그래도 푸석해 바스라지기 직전의 머리를 거칠게 만져댔다. 그리운 아버지의 두툼한 손길도 아니고, 인사를 잘 받아주던 작년에 먼저 세상을 뜬 동네 아저씨의 손길도 아닌 웬 낯선 남자의 옹이 베긴 손의 촉감이 선연하게 닿았다. 불쾌한 감촉에 인상을 찡그렸다만 컴컴한 사방에 작은 뒤틀림이 드러나긴 여간 쉽지 않았다.
소비자 생각? 그런 겨를이나 좀 주고 말하라지. 남을 생각한단 말이나 베푼다는 말들은 본인이 풍족할 때에 다다라서야 자연스레 나오는 거였다. 자기 허리띠 졸라매가며 남의 허리띠는 느슨하도록 풀어주는 자가 어디 있겠냐며.
그러나 그 말까지 여지없이 진솔하게 드러냈다간 자신 뿐 아니라 동네에 큰 화를 불러올까 싶어 잠자코 있었다. 사내는 무어가 그리 재밌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주 배꼽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동네는 여전히 조용했다. 사내의 큰 웃음소리만 조용한 동네에 메아리 져 울려퍼졌고 사방은 쥐가 간식을 탐하는 소리 하나 없이 적막의 연속이었다. 뒤에 서 있던 사내들도 눈치를 보다 엉거주춤 따라 웃었고, 그 알게 모를 씁쓸한 웃음 소리와 함께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여전히 내팽겨쳐진 옷 한 벌은 주인을 못 찾고 흙이 묻어 바닥에 자리하고 있었고, 동시에 울려퍼지는 여러 대의 트럭의 시동거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 무리는 떠났고, 그는 움직임 없이 서 있었지만, 그들은 변화를 체감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고 그들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는 걸.
용기는 용기를 불러왔다. 그의 사소한 반문이 수많은 반문들을 던졌고, 사람들은 제각각 자문하기 시작했다. 더뎠지만. 타지 사람들의 눈에는 변화가 흐릿하기만 했지만. 아주 더디게 변화의 과정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동네는 그를 영웅이라 일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