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해가 웃을 때

《노란 해가 웃을 때》 3화

같은 지붕 아래


같은 지붕 아래


한노아가 우리 집에 눌러앉았다.


혼례 준비를 핑계 삼아 아주 태연하게.  

좌의정 댁에서 정식 허락을 받았다는 말 한마디로  

한노아는 그날부터 우리 집에서 머물기 시작했다.


“…왜 여기서 지내시겠다는 겁니까.”


나는 복도 끝에서 노아를 불러 세웠다. 그는 방을 둘러보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혼례 준비를 하려면 가까이 있는 편이 낫지 않느냐.”  


입꼬리를 가볍게 올린 얼굴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게다가, 그대 얼굴도 익힐 겸.”


나는 숨을 길게 들이켰다.  노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곧 내 아내가 될 사람 아닌가.”


“…혼례 전까지는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미리 연습하는 거다.”


뻔뻔하다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저 말투 저 눈빛 그리고 그 말의 태도. 그 어느 것도 조선의 예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혼례 전에 사윗감이 처가에 머무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흔하진 않겠지. 하지만 안 된다는 규율도 없다.”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조선의 예법은 오래 비워둔 사람에겐 꽤 낯설단 말이지.”


“머무실 방은… 이 건너방입니다. 손님용으로 쓰던 곳이지요.”


“네 방 옆이군.”  


그는 어쩐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그는 이 집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내 일상의 자리를 조금씩 차지해갔다.


_____


이른 아침

안뜰로 나왔다. 햇볕이 아직 물기 마르지 않은 돌길 위로 느릿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요즘 밤새 단 한숨도 쉬지 못했다.

건너방에서 새어나오는 기척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발소리, 문 여닫는 소리… 아니, 그냥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집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었다.

햇살은 그 사이로 은은히 떨어졌다.


뜰 한쪽 나무 벤치에 가만히 앉았다.

책을 펼쳤지만 마음은 도무지 활자 위에 머물지 않았다.


그때,

뒤쪽에서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한 집에 사는 처지인데, 마주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낯익은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노아가 정자 계단을 내려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혹, 나를 피하는 건가?”


그는 내 앞에 멈춰 서서 부드럽게 물었다.


“방 안에서 나오는 일도 드물던데.”


나는 책장을 넘기며 대꾸했다.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지요.”


“하루 종일 말이냐? 대단하군. 경전에라도 빠졌느냐?”



“그럴 수도 있지요. 책이 많으니까요.”


그가 가볍게 웃었다.


“예전엔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이, 이젠 책 속에만 숨네.”


“…오해입니다.”


“나는 그대를 낯선 사람으로 대하고 싶진 않다.”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내렸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노아는 내 앞의 돌기둥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꼬리엔 여느 때처럼 느긋한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그 속에 서운한 기색이 어렴풋이 스쳤다.


“그대도 그러면 좋겠어.”


“뜰이 예전보다 넓어진 것 같다. 손을 많이 본 모양이야.”


“예. 어머니께서 직접 정원을 손보셨습니다.”


“그대 어머님 손길은 참 정갈했지. 옛 정취 살리면서도, 이상하게 새로움을 더하실 줄 아는 분이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참 변한 게 없네.”


“공자님께선 변하셨습니까.”


“조금은. 허나, 본디 사람은 본질이 쉬이 바뀌지 않지.”


노아는 그 말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한 발 앞서 나간 뒤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식사나 같이 하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혼례 전 남녀가 한 상에 앉는 일은 예가 아닙니다.”


“그런가. 허나 우리는 예만으로 묶일 사이도 아니지.”


그의 말투엔 여전한 여유가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그는 미소 지었다. 입꼬리만 가볍게 올라간 그 웃음은 어쩐지 오래전 기억과 겹쳐졌다.


바람이 불었다.

그 짧은 순간 마음 한 구석도 함께 흔들렸다.


식사는 사랑채 작은 온돌방에 조용히 차려졌다.

두 사람의 상 위에 따뜻한 국과 소담한 반찬들이 놓였고 창밖으로는 조용한 바람만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노아도 천천히 밥을 들기 시작했다.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소리 없이 국을 뜨고 젓가락 끝으로 반찬을 집는 동안에도 말은 쉽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맛이 그대로네. 그 시절 그대로.”


나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주방을 맡은 분이 예전 그대로이십니다. 어머님께서 생전에 오래 두고 아끼신 분이기도 하고요.”


노아는 잠시 침묵했다. 곧 찻잔을 들며 낮게 말을 이었다.


“…자꾸 그분 얘기를 꺼내게 되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쓰인다. 내가 이 집 드나든 것도… 그분 살아 계실 때뿐이었으니까.

대화하고 싶은데, 꺼낼 말이 그 시절 얘기뿐이라—미안하다.

늦었지만, 마음 깊이 애도를 표한다. 찾아뵙지 못한 무례는… 용서받을 수 있길 바라.”


그 말은 부드럽게 흘렀지만, 그 속엔 미처 감추지 못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노아는 웃지도 덧붙이지도 않았다.

잠시 그렇게 찻잔을 들고 있다가 차분히 자리에 놓았다.


이후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동안은 밥그릇에만 시선이 머물렀다.


그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상 위까지 이리 고요하면, 네가 책 읽을 때보다 더 조용하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공자님께서 자꾸 미안하다 하시니 밥맛을 놓칩니다.”


“그래? 그럼 식후엔 더 말 없이 움직이마.”


“…식후에 무엇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는 능청스럽게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는 뜻모를 눈길로 나를 보았다.


“잠깐 나가고 싶어서.”


“대체 어디를요?”


“걱정 마. 멀지 않아. 그대도 좋아할 만한 데.”


“말씀을 해 주셔야 준비라도 할 터인데…”


“지금 준비되어 있지 않는가? 도포 걸치면 그만이지.”


나는 그의 태연한 얼굴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 연못가라도 가시려는 겁니까?”


“연못가도 좋고, 아닐 수도 있고.”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웃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사람많은 곳은 피하고싶습니다.”


“좋아 할거다.”

“괜히 따져 묻다 보면 있던 시간도 놓치겠군.”


“…공자님, 혹시 지금 바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분명히 작정한 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벌써 도포 자락을 털고 일어섰다.


나도 결국, 말없이 도포를 챙겨 그 뒤를 따랐다.


_____



골목을 돌아나가자 바깥은 생각보다 더 시끌벅적했다. 종각 너머 장터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고 종이 매듭이나 팔찌를 파는 소녀들이 종알종알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붐비는군.”


노아가 말하며 모자를 고쳐 썼다.

긴 머리카락이 은근슬쩍 도포 안으로 숨었다.


“이 모습이면, 누구도 날 알아보진 않겠지.”


“…정말 조용한 데로 가려던 거 맞습니까?”


“이만하면 조용한 편 아닌가? 서로 아는 얼굴이 없는 곳이니까.”


나는 대답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터 끝 쪽에선 민속인형극이 한창이었고 연등을 파는 노인이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문득 노아가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사람 많은 데서 길 잃을까 염려되어서.”


“길을 잃긴요. 어릴 때 이곳 골목은 제가 더 잘 알았는걸요.”


“그럼 길 안내는 그대가 맡는거로. 나는 따라가지”


그 말투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흘깃 노아를 바라보았다.


“하인과 상전이라도 된 듯하네요.”


노아가 웃었다.


장터를 돌아 상점들이 모인 쪽으로 향했다.

향첩, 부채, 병풍 조각, 매듭 공예,

수공예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 한 줄로 놓여 있었다.


나는 매듭 노끈에 잠시 시선을 뒀다가 다시 노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데서 무엇을 하려 하셨습니까.”


“산책도 하고 눈도 구경하고 그리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대 얼굴도 보고.”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한지 부채를 들었다.


노아는 옆에서 조용히 손을 뻗어 다른 부채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잎사귀를 닮은 옅은 청록색 바탕에 얇게 금사를 둘러 수묵 난초가 비쳐 있는 부채였다.


“이건 어때. 그대한테 잘 어울릴 듯한 색인데.”


나는 시선을 주지 않고 대꾸했다.


“제 것을 사시렵니까.”


“왜 아니겠냐. 혼례 앞둔 정혼자가 부채 하나쯤 사는 건 예에 어긋나진 않으니.”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이유로 뭐든 가능한 건가요?”


노아는 잠시 웃음을 머금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정혼자란 게 이렇게 편리할 줄은 몰랐지. 아니면 그대가 예뻐서 라고 하면 좀 덜 밉겠느냐?”


“... 그건 더 이상하네요.”


“그럼 이렇게 하지. 오늘 하루 그대 옆에 있었던 기념으로. 나한테 남는 장면이 될 것 같아서.”


이 사람은 늘 이런 식이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로 사람을 건드리는 재주.


노아는 가게 주인에게 부채 값을 건넸다. 

포장을 받은 뒤 천천히 내게 내밀었다.


“그대가 직접 고르진 않았지만 기념이란 건 꼭 마음이 동했을 때만 남는 건 아니다. 어느 날 우연히 손에 쥐고 있던 것 하나가 더 오래 기억되기도 하지.”


나는 그것을 받지 않는 대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념할 만한 하루가 아니면 괜히 짐만 되겠죠.”


노아는 웃었다. 이번엔 목소리 없이 조금 길게.


“그럼 내가 두고두고 꺼내 보겠지. 내가 이걸 들고 당신 앞에 서서 주지도 못한 선물 하나쯤 혼자 자랑스럽게 들고 있었다고 추억하며 말이지.”


나는 그 말에 결국 작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말솜씨는 여전하시네요.”


노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손을 뻗어 부채를 받았다. 한참 만에.


“...그래야 그대가 나를 두 번 보고, 가끔은 세 번도 볼 거아닌가.”


한 박자 늦은 말끝이 어쩐지 길게 맴돌았다.


나는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 맞은편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종이와 족자, 화첩들이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었다.


노아도 눈치를 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저쪽은 그림을 파는군.”


그는 무심한 듯 시선을 옮겼다. 노점에 걸린 족자들, 가지런히 쌓인 화첩들. 


그 중 한 장. 


나는 문득 시선을 멈췄다.


바람결에 조금 들린 책장 사이로 내 손끝이 기억하는 선. 


“이 그림이 마음에 드는가?”


노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조용히 들려왔다. 

나는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눈에 들어왔어요.”  


노아는 내 옆으로 와 함께 그림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없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붓을 눌렀다가 다시 뺐군. 선을 잇기보다 멈추는 쪽에 더 집중한 필법이다. 그런 사람은 감정보다 간격을 더 고민하는 편이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림을 볼 줄 아십니까?”


노아는 가볍게 웃으며 화첩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림이 아니라 사람을 본 거다.”  


그리고 다시 덧붙였다.  


“좌의정 댁에서 자란 사내는 칼을 잡기 전에 시서화(詩書畫)는 으레 손에 익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했다.

가문에서 기대하는 만큼은 해내는 사람.

그가 바로 한노아였다.


“기념으로 한 점 들이고 갈까 했는데—”


노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가 다시 내가 한참 바라보던 그림을 따라봤다.


“아쉽군. 오늘은 그대가 먼저 눈을 줘버렸으니.”


나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히 말했다.


“보는 거랑 사는 건 다르죠.”


노아가 피식 웃었다.


“그럼, 마음에 들어도 안 산다는 건가?”


나는 그림에서 완전히 눈을 떼며 말했다.


“네. 안 삽니다.”


말투에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림을 보는 건 좋아해도 벽에 걸릴 그림엔 취향이 까다로워서요.”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한 번 더 봤다.


“…그대다운 기준이군.”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


“근처에 책방 있어요. 사람도 적고 조용한 데.”


“조용한 데. 좋지.”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림도 내 반응도. 

모두 거기 그대로 남겨둔 채 발걸음만 돌렸다.


한 폭의 도화는 바람결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______



책방에 도착하자 나는 평소보다 많은 책을 골랐다.  

책방은 장터 끝자락 오래된 기와 아래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밖의 소란이 무색할 만큼 이 안은 고요했다.


나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습관처럼 곧장 오른편 책장으로 향했다.


“자주 오는 곳인가?”


노아가 조용히 뒤따라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다더니 과장이 아니였군.”


“소문이 아니라 사실일 뿐이죠.”


책등을 천천히 넘기던 나는 곧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아는 책장에 등을 기대며 지켜봤다.


“아무거나 집진 않네.”


“읽을 거니까요. 고르는데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죠.”


“전부 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생각으로 고르는 거니까요.”


그 말에 노아는 피식 웃었다.


“…그러면 나도 하나쯤.”


곁에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든 그는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시집이군.”


나는 책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바꾸시죠. 안 맞을 것 같은데요.”


“글쎄. 요즘은 맞고 안 맞고보다 뭐든 익혀야 할 때 같아서.”


그 말은 가볍게 흘린 듯했지만 뒷말은 없었다.


결국 나는 책 일곱 권을 골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들어주었다.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는 길. 노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잔뜩 빌려가는 사람은 처음 봤다.”


“평소엔 이보다 많을 때도 있어요.”


“혼례 앞둔 규수가 보기보다 바쁘구나.”


나는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노아는 말없이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괜히 엉뚱한 데 가지 않게 옆에 붙어서 따라오세요.”


노아가 작게 웃었다.


“그 말 마음에 드는군.”


책을 안은 그의 옷자락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나는 옆으로 바짝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 거리가 오늘은 딱 알맞았다.


3화 같은 지붕 아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