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여주
━ 하하··· 하하···. 제발 오지 마라···.
전 남친과 헤어지고 1년이나 지났는데 갑자기 왜 그러는지. 갑자기 술 마시고 내 눈앞에 나타나서는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늦은 밤, 나를 계속 쫓아와서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무작정 뛰어 한 골목에 몸을 숨겼다. 정말 다행히도 전 남친은 다리를 조금 다쳐서 빨리 뛰지를 못한다. 운이 좋았던 걸까.
전 남친
━ 어디 있냐!!! 나와라, 진짜. 안 나와? 시X!!
늦은 밤이고,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지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주변 집들에 너무 민폐였다. 그렇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본인도 지쳤나 간 건지 조용했다. 조심히 나오려고 한 발을 앞으로 디뎠는데 누가 뒤에서 내 손목을 잡았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는데 그 뒤에 있던 사람이 내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나의 귀에 속삭였다.
?
━ 아직 안 갔어요. 소리 지르지 마세요.
나를 아는 사람인가, 짐작이 안 갔다. 목소리는 처음 듣는 소리였고, 뒤에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다. 일단 전 남친보다는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인 걸 확신하고 가만히 있었다.

전정국
━ 여기 잠깐 가만히 있어요.
그러고는 먼저 앞으로 가 길을 살폈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건지 그 사람은 이제 괜찮다는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정말 누군가 싶었다.
하여주
━ 갔어요···?
전정국
━ 네.
하여주
━ 그런데 누구···세요?
전정국
━ 당신이야말로 누구세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먼저 다가와서는 놀라게 하지를 않나, 나를 구해주지 않나 본인이 먼저 나에게 다가왔으면서 내가 누구냐고 묻자 대답은커녕 되묻기만 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인데 도와줬다고?
하여주
━ 네···? 나를 아니까 도와준 거 아니에요?
전정국
━ 아닌데요.
하여주
━ 그럼 도대체 왜···.

전정국
━ 당신이 내 영역에 들어왔잖아요.
하여주
━ 아니, 뭐라고요···?
전정국
━ 내 영역에 누가 들어오는 거 X나 싫어하는데 다급해 보여서 도와준 거예요.
욕과 함께 나에게 조곤조곤 말하는 이 남자가 갑자기 무섭게 느껴져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마 잘못 걸린 듯했다. 일단 빨리 마무리 짓고 집이나 빨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여주
━ 죄송해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전정국
━ 어디 가요.
하여주
━ 네···?
전정국
━ 어디 가요, 내 영역 침범해 놓고.
하여주
━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제가 집에 가봐야 해서···.
전정국
━ 여기 한 번 들어오면 못 나가요.
하여주
━ 뭐라고요?
전정국
━ 한 번에 잘 못 알아들으시네. 여기, 한 번 들어오면 못 나간다고요.
하여주
━ ······.
아무래도 이 사람도 정신이 마땅치 않은 게 확실했다. 진짜 오늘 제대로 잘못 걸린 거 같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계속 본인 영역 침범했다고 그러지를 않나, 못 나간다고 그러지를 않나.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전정국
━ 나랑 같이 살아요.
하여주
━ 네?!!
전정국
━ 쉿. 소리 지르면 입 막아버릴 거예요.
하여주
━ 내가··· 왜 당신이랑 같이 살아요?
전정국
━ 같은 말 반복하게 하는 거 X나 질색인데. 그냥 묻지 말고 같이 살라면 같이 살아요.
하여주
━ 나한테··· 왜 그래요···?
전정국
━ 울지 말아요. 당신이 내 영역에 발을 디딘 거에는 책임을 져야죠. 뚝.
순간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마침내 툭 떨어졌다. 너무 무서웠다, 지금 이 순간이. 무섭게 욕을 하다가도 울지 말라며 나를 달래주는 이 남자, 이중인격처럼 보였다. 어차피 자취하고 지금 당장은 집에 못 들어갈 거 같아서 우선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난 진짜 죽을 거 같았다.
하여주
━ ···원하는 게 뭐예요? 돈이 필요한 거예요?
전정국
━ 아니요ㅋㅋㅋ 당신만 있으면 돼요.
하여주
━ 알겠어요,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전정국
━ 저의 집으로 가요. 여기 뒤 아파트예요.
일단은 저 아파트면 내 집에서도 멀지 않고, 그냥 일단 순순히 따라갔다. “손.” 이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손 뭐 어쩌라는 건지 그의 손만 빤히 쳐다보았다.
전정국
━ 손잡으라고요.
하여주
━ 네? 손은 왜···.
전정국
━ 떠는 거 같아서. 안정시켜 주려고.
이 남자 갈수록 궁금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만 계속해대고 정말 안정시켜 주려는 건지 그의 의도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 따뜻한 감정마저 밀어낼 필요는 없는 거 같아 이 남자 손 위에 내 손을 포갰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남자 손을 잡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지금은 최우선이었다.
전정국
━ 손이 차갑네요.
하여주
━ 제가 수족냉증이 있어서···.
전정국
━ 내 손은 따뜻해서 괜찮을 거예요. 그렇죠?
하여주
━ 아, 네···.
전정국
━ 여기예요.
어느새 이 남자 집에 다 왔고, 그는 도어락을 능숙하게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나는 따라 들어가려는 발을 순간 멈췄다. 문득 그가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한 번 들어오면 못 나가요.’
전정국
━ 왜 그래요? 설마 여기까지 와놓고 도망칠 생각이에요?
하여주
━ 여기도 한 번 들어가면 못 나가는 거예요?
전정국
━ 똑똑하네요. 그런 생각을 다 하고. 그것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하여주
━ ······.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괜한 걸 얘기한 건가 싶기도 했다. 안 말했으면 집에 보내줄 확률은 높아질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이 말을 꺼냄으로써 확률은 급등하게 낮아진 거 같다.
전정국
━ 들어와요.
하여주
━ 진짜 들어가면 안 보내줄 거예요?
전정국
━ 내 영역에서부터 안 보내줄 생각이었는데.
하여주
━ 왜요···?!

전정국
━ 당신이 나의 영역에 들어왔고, 난 당신한테 빠져버렸으니까···?
하여주
━ 네?!
이젠 정말 그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 영역에 들어와서 안 보내주는 거 플러스 이제는 나에게 빠졌다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해야만 나에게 빠질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전정국
━ 스스로 들어올래요, 강제로 들어올래요?
하여주
━ 들어갈게요···.
갑자기 눈빛이 맹수처럼 돌변하는 것이 더럽게 무서웠다. 일단 들어가서 생각해 보자 하고 스스로 소굴에 들어갔다. 어차피 핸드폰도 있으니 언제든 신고할 수 있는 거고.
전정국
━ 핸드폰은 나한테 줘요.
‘뭐?!!!‘
하여주
━ ㅇ, 왜.
전정국
━ 왜 반말이에요.
하여주
━ 왜요···.
전정국
━ 당신이 언제든 신고할 수 있잖아요. 어차피 신고하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데. 신고할 생각이었어요?
하여주
━ 아, 아니요···?
전정국
━ 그러니까 줘요. 당분간 내가 가지고 있을게요.
하여주
━ 여기···.
이제는 신고할 방법도 사라졌다.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어떻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바로 저런 말을 하는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그에 혼동만 커졌다.
하여주
━ 그런데요··· 모자는 안 벗어요?
전정국
━ 왜요?
하여주
━ 아니, 그냥···. 집인데 모자 계속 쓰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전정국
━ 그렇게 얼굴을 보고 싶어요?
하여주
━ 네!
전정국
━ 싫어요.
하여주
━ 아··· 너무 해요.
언제 봤다고 좀 편해지는 분위기 덕분에 나도 점점 편해졌다. 이 사람 그냥 일반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다는 게 느껴졌다. 그냥 나쁜 사람이면 나랑 말도 안 할 테고 무섭게만 굴었을 텐데 지금 이 남자의 행동을 통틀어서 보면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싫다면서 모자를 드디어 벗어젖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여주
━ 아···.
전정국
━ 왜 실망하는 눈치예요?
하여주
━ 아는 사람이면··· 했죠.
전정국
━ 나 몰라요? 갑자기 기분 나빠지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