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친한 형, 동생 사이가 된 태형과 정국은 서로 전화 번호를 주고 받았고 정국은 전화를 받더니, 먼저 급하게 가버렸다.
쌀쌀한 날씨에 주머니에 손을 넣자, 무언가가 느껴져서 꺼내 보자 그건 다름이 아니라 태형이 도와주었던 할머니가 주신 소원 팔찌였다. 할머니가 소중한 사람, 대도록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라고 했었는데, 태형에게는 아직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소원 팔찌를 주머니에서 빼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때, 한빛이 태형에게 다가왔다.
"어? 그거 소원 팔찌 아니에요?"
"아, 네. 맞아요."
소원 팔찌를 보는 한빛의 눈이 반짝였다.
"색깔 되게 예쁘다. 그 팔찌 받으실 분 좋겠어요."
"이거 한빛 씨가 하실래요? 사실은 그 제가 말했던
할머니한테서 받은 건데, 줄 사람이 없어서요."
한빛은 놀란 눈빛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아, 남자친구 분께서 싫어하시려나...?"
"전 항상 바쁜데, 남자친구가 어디 있겠어요. 태형 씨도 줄 사람 없다고 말하시는 것 보면 여자친구 없으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아, 들어보니 그러네요. 저도 일에만 집중을 해서
여자친구는 없어요."
"음... 일에만 집중을 해서 여자친구가 없으신 거예요,
아니면 그냥 만날 사람이 없는 거예요?"
"한빛 씨의 말을 들으니까, 둘 다인 것 같네요."
태형은 한빛의 오른쪽 손목에 소원 팔찌를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게 끊어지면 한빛 씨의 소원이 이루어질 거예요. 한빛 씨의 소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요."
태형의 말은 감동이었다. 다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좋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였다.
"고마워요, 태형 씨."
사실 눈치가 빠른 한빛은 태형에게 여자친구가 없다는 건 거의 알고 있었다. 태형도 탐정인 만큼 한빛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첫번째로 한빛의 전화기 배경화면에는 남자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고, 두번째로 커플 반지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세번째는 한빛과 같이 있었을 때, 한빛은 전혀 전화기를 만지지 않았다. 연락을 자주 하는 남자가 없다는 것은 남자친구가 없다는 뜻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이 둘은 서로한테 관심이 있었다. 왜 연예인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는 한빛은 도도하면서도 남을 챙길 줄 알고, 그 무엇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탐정이라기보다는 모델이 더 잘 어울리는 태형은 일할 때는 거칠고 무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여리고 착하고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탱해주고 서로를 위로해주면서 어느새 이 둘은 많이 가까워졌다.

여섯번째 날, 사무소로 일찍 출근한 태형은 이제 남은 대학교들을 하나하나씩 정리하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대학교에서 가수 서울을 찾지 못할 수도 있으니, 꼬박꼬박 가수 서울의 너튜브 채널으로 들어가서 다른 증거들을 찾았다.
한편 그 시각 한빛은 정국과 만나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다. 회사로 들어오지 않고 자꾸 밖에만 도는 한빛이 걱정되는 정국이다.

“선배, 진짜 언제까지 이러실 생각이세요?”
“내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그 일만 해결하면 다시 회사 들어갈 거야.”
“그 중요한 일이 도대체 뭔데요? 저한테까지 숨기실
거예요?”
“때가 되면 다 말해줄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정국은 사실 어제 한빛을 회사에 다시 오게 하려고 한빛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태형이 있었기에 얘기하지 못하고 밥만 같이 먹었다.
“회사에는 지금 선배가 필요해요. 선배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도 선배가 더 잘 알잖아요.”
“그래. 잘 알아. 하지만 지금은 회사보다 내 일이 먼저야. 오래 안 걸리니까, 나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줘. 제발
부탁이야.”
한빛이 간절한 마음으로 정국에게 부탁을 하자 정국은 그런 한빛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너무 오래 걸리지는 마세요. 선배가 올 때까지 제가 어떻게든 해결하고 있을게요”
정국은 한빛의 중요한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이 정말로 존경하고 아끼는 선배이기 때문에 정국은 한빛을 믿었다.
한빛은 정국이랑 만난 뒤, 바로 태형의 사무소로 향해서 같이 예나의 음성 확인 검사 결과를 받기 위해서 법원으로 갔다. 법원으로 들어간 태형은 긴장되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예나와 가수 서울의 음성 확인 검사 결과를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빛을 생각해서 검사 결과를 바로 확인하지 않고 곧장 한빛에게 달려갔다.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온 태형에게 한빛이 물었다.
“검사 결과는 확인하셨어요?”
잠시 숨을 고른 태형이 한빛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요. 한빛 씨랑 같이 확인하고 싶어서 바로 들고
내려왔어요.”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보인 태형이 검사 결과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은 태형이 두 번째 장을 확인하였다. 그 종이의 마지막 부분에는 ‘사람 1의 목소리는 사람 2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사람 1은 사람2는 동일 인물이 아님으로 확인 되었습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검사 결과을 확인한 한빛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태형에게 말했다.
“역시... 예나 씨의 목소리는 정말로 좋았지만, 가수 서울의 목소리랑은 그렇게 비슷하지는 않았어요. 예상했었던 결과지만, 막상 제 눈으로 직접 보니,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의외로 덤덤한 한빛과는 달리 태형은 실망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실력으로 가수 서울을 찾는 건 역시 역부족인가
봐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태형 씨는 가수 서울을 꼭 찾을 수 있어요.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 봐요.”
자신은 자신감이 다 떨어졌는데, 오히려 더 힘을 내려고 하는 한빛에 태형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빛 씨도 포기를 안 하시는데, 부끄럽네요. 이런 말해서 미안해요.”
태형의 말을 들은 한빛의 얼굴에 미소가 띄었다.
“방금 태형 씨 금지어 말했어요. 그럼 저 소원권 하나
얻은 겁니다.”
금지어라는 말에 자신의 기억을 소환한 태형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도로 담을 수 없었다.
한빛과 태형은 서로에게 금지어를 미안하다는 말로 정하고, 그 말을 사용하면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한빛 씨의 소원은 뭐예요?”
“그건 나중에 쓸게요. 아직은 보류.”
“얼마나 큰 소원을 말하시려고...”
“음...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죠?”
소원권이 생긴 한빛은 기분이 좋은 듯 흥얼거렸다. 그런 한빛을 보는 태형의 기분도 같이 좋아졌다. 비록 한빛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게 생겼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