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오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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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정리하고 돌아와.”
여주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엄마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꽃집도.”
“.......”
“지금 네가 쌓아놓은 생활도.”
엄마는 단어 하나하나를 분명하게 눌러 말했다.
“너만 재밌는 장난은 이제 그만하고”
여주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엄마.”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엄마는 말을 끊었다.
“네 아빠도.”
그 말이 나오자 여주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많이 봐주고 계셔.”
“.......”
“아무 말 안 해서 포기한 줄 알았니?”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주는 거야.”
“.......”
잠깐의 침묵 뒤에 엄마가 말을 바꿨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
“혼사 얘기도.”
“.......”
“이제 슬슬 나올 나이야.”
“엄마.”
“집안도 좋고.”
“.......”
“조건도 맞고.”
“그래서요?”
“여주야.”
“저는요”
여주는 말을 자르듯 이어갔다.
“제 인생을 조건으로 정리할 생각 없어요.”
엄마의 표정이 굳었다. 이번엔 분명히 불쾌함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예의 지키고 있어요.”
여주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급하지도 성급하지도 않았다.
“오늘 만나자고 하신 거.”
“.........”
“이 얘기하려고 부른 거면.”
엄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제가 할 수 있는 선이에요.”
잠깐 정적.
여주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주는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인사라기보다는 마무리에 가까웠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여주는 그대로 돌아섰다. 카페 문을 밀고 나가는 순간 숨이 한꺼번에 빠져나왔다. 다리가 조금 무거웠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여주는 손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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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골목 끝에 있는 꽃집 문을 열었을 때 시계는 오후 네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꽃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물을 갈아준 지 얼마 안 된 장미와 막 들어온 리시안셔스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주는 가방을 내려두고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괜히 숨을 한 번 고르고 불을 켰다. 조명이 켜지자 공간이 조금 살아났다.
“해보자.”
앞치마를 두르고 물통을 들었다. 생각을 없애려 줄기 끝을 다시 자르고 시든 잎을 정리했다.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래도 가끔씩 멈칫했다. 엄마의 말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너만 재밌는 장난은 이제 그만하고.
여주는 고개를 한 번 털듯 흔들고 다시 물을 갈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네 시 반. 아직 이른데도 괜히 문 쪽을 한 번 더 봤다. 누가 올 시간도 아닌데. 미치겠다... 이럴 때면 항상 생각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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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면서 꽃집 안의 공기도 조금씩 바뀌었다. 오후 내내 손님이 끊이지는 않았지만 정신없이 바쁜 정도는 아니었다. 여주는 한 사람 한 사람 응대하는 데 집중했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문에 걸린 종이 한 번 가볍게 울렸다. 여주는 자동으로 시계를 봤다. 오후 일곱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불을 하나 더 켜고 바닥에 떨어진 잎을 쓸어 담았다. 이 시간쯤이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문 쪽을 한 번 더 봤다.
그때였다. 유리문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비쳤다. 반사된 불빛 때문에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정장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친 채 서 있는 석진이었다. 여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안 바쁜가 봐.”
“이제 막 끝났어요.”
석진은 안으로 들어오며 가게를 한 번 천천히 둘러봤다. 꽃이 줄어든 진열대와 정리된 계산대. 하루가 꽤 지나갔다는 흔적들이었다.
“하루 잘 보낸 얼굴이네.”
“그건 처음 듣는 칭찬인데요.”
“나만 쓰는 표현이야.”
석진은 계산대 옆에 서서 잠깐 더 가게 안을 봤다. 꽃병 안 물 높이와 정리된 리본 묶음들. 여주가 손댄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더 짙었다. 여주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한 번 문질렀다. 그걸 본 석진이 별말 없이 자신의 재킷을 여주 쪽으로 조금 더 당겨 걸쳤다. 입혀주지는 않았다. 선택할 수 있게 놔두는 방식이었다.
“춥진 않아?”
“응. 오늘은 선선한 것 같아요”
그 말에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로 향하는 동안 둘 사이에 쓸데없는 말은 없었다. 대신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여주가 반 박자 늦어지면 석진도 같이 늦췄다. 차에 타자 익숙한 공간이 둘을 감쌌다. 시동을 걸고 나온건가. 차 안은 추운 밖과 달리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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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은 현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린 여주를 한 번 보고, 다시 집 안을 한 번 훑어봤다. 낮에 봤던 물기 자국은 거의 말라 있었지만 욕실 쪽은 여전히 정리가 덜 된 느낌이었다. 그는 여주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
“급한 것만 챙겨.”
“네?”
“나머지는 안 가져와도 돼.”
“왜요?”
석진은 잠깐 말이 없었다. 설명해야 할 걸 고민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미 결정해 둔 걸 어떻게 말할지만 고르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집에.”
“네.”
“이미 있어.”
“.....?”
여주는 잠시 멈췄다. 웃어야 할지 물어봐야 할지 애매한 표정으로 석진을 봤다.
“뭐가요.”
“네가 쓸 것들.”
“…….”
“아주머니가 이미 다 준비해놨어.”
“언제요?”
“아까 너 나갔을 때?”
여주는 그 말에 잠깐 말이 막혔다. 고개를 기울인 채로 석진을 다시 봤다. 놀랐다는 표정과 어딘가 납득이 가는 얼굴이 겹쳐 있었다. 분명 얌전히 나갔고 집 안에 남은 흔적도 거의 없었는데 아주머니는 이미 그 빈자리를 눈치챈 셈이었다.
“그럼 진짜 필요한 것만 챙길게요.”
“응.”
“잠깐이면 돼요.”
“천천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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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다 챙기고 다시 차에 올라탔을 때 차 안에는 꽃집 냄새와 저녁 공기가 섞여 있었다. 트렁크를 닫는 소리가 끝나고 석진이 운전석에 앉았다.
차가 다시 큰길로 올라서자 차 안에 묘하게 안정된 정적이 깔렸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가며 실내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주는 창에 기대 앉아 있다가 손에 쥔 가방 끈을 한 번 정리했다. 괜히 손이 바빴다. 짐은 다 챙겼고 이제 갈 곳도 정해졌는데 마음만 아직 도착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석진이 한동안 말이 없다가 운전대에서 한 손을 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여주가 고개를 돌렸다.
“네?”
“호칭 말이야. 계속 석진 씨로 가는 게 맞아?”
“푸흡...”
“웃어? 나 지금 심각해 여주야”
“듣고 싶은 호칭 있어요?”
여주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지만 눈가에는 웃음을 참고 있는 기색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석진은 그 표정을 가만히 보다 시선을 다시 앞쪽 도로로 돌렸다. 핸들을 잡은 손에 아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있지.”
짧게 답했는데 말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장난으로 끝낼 생각은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근데.”
“네”
“말 안 할래.”
“? 왜요.”
“어차피.”
“.......”
“안 불러줄 거잖아.”
여주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예상 못 한 반응이었다. 장난스러운 투정 같기도 하고 진짜로 삐친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톤이었다.
“아니에요.”
“아냐.”
석진이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지금까지 계속 석진 씨였잖아.”
“그건…”
“편해서 그런 거겠지.”
말은 담담했는데 끝에 아주 희미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 그 미묘한 온도 차이를 여주가 놓치지 않았다.
여주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손에 쥔 가방 끈을 괜히 한 번 더 고쳐 잡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오빠”
그 한 단어가 떨어지는 순간.
석진의 손이 진짜로 멈췄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선도 도로에서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귀 끝이 아주 천천히 붉어지는 게 가로등 불빛에 분명히 보였다.
“…여주야.”
“싫어요?”
“아니.”
바로 나왔다.
“싫은 건 아닌데.”
“그럼요.”
“좀.”
석진이 낮게 웃었다. 스스로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준비할 시간을 줘야지.”
여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호칭 부르는 데 준비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어딨어요?”
“여기 있잖아.”
석진이 곧바로 받아쳤다.
“지금 심장 박동이 좀 빨라.”
여주의 웃음이 더 커졌다.
“진짜예요?”
“응.”
“그렇게 놀랐어요?”
“너는 모르겠지.”
석진이 옆을 슬쩍 봤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그 말이 떨어지자 여주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 대신 표정이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그럼 취소할까요?”
“하지 마.”
석진이 바로 말했다.
“이미 들었어.”
“……”
“이제.”
그가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되돌리기 없음.”
여주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그럼 앞으로는.”
“응.”
“오빠로 부르면 되는 거예요?”
석진이 잠깐 생각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그건.”
그가 아주 느리게 말했다.
“네가 부르고 싶을 때만.”
“왜요.”
“그게 더 좋으니까.”
잠깐 정적.
그리고 석진이 덧붙였다.
“억지로 듣는 건 의미 없잖아.”
여주의 표정이 아주 조용히 부드러워졌다.
“그럼.”
“응.”
“지금 너무 편함 이슈!”
"......"
”석진 오빠.”
이번엔 훨씬 편한 톤이었다.
석진의 집 앞에 도착해 시동을 끄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살짝 굳었다.
“…여주야.”
“왜요~?”
“이거.”
그가 낮게 웃었다.
“적응하는 데 시간 좀 걸릴 것 같아....”
여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천천히 해요.”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 말했다.
“오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