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오후5시
7
어느새 마지막 화분을 제자리에 두자, 가게 안이 한 박자 늦게 조용해졌다. 여주는 허리를 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끝—.”
말 끝을 늘리며 손뼉을 한 번 쳤다. 그제야 석진은 손에 남은 흙을 털어냈다. 둘 사이에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하다고 하기도 애매한—.. 막 이름을 알게 된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여주는 잠깐 석진을 보더니,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 시간에 그냥 가시긴 좀 그렇죠.”
말을 꺼내놓고 나서, 여주는 스스로도 살짝 머쓱해진 듯 입꼬리를 올렸다. 괜히 말을 던져놓고 수습하는 사람처럼, 장갑을 벗어 한쪽에 내려두며 말을 이었다.
“아, 막… 뭐 대단한 건 아니고요. 그냥… 차라도 한 잔.. 괜찮으시면요.”
석진은 잠깐 가게 안을 둘러봤다. 아까보다 훨씬 정돈된 공간, 제자리를 찾은 화분들, 그리고 숨을 고른 듯한 공기.
어제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었다. 석진은 여주의 물음에 대답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잠깐만요.”
여주는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딸기랑 포도! 오렌지주스도 있어요 뭐 드실래요?.”
“오렌지로 할게요.”
“그럴 줄 알았어요.”
말하며 오렌지주스를 꺼내 탁, 하고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 것도 하나 더 꺼내 병뚜껑을 돌리며 말했다.
“이 시간까지 가게에 손님 있는 날은 잘 없거든요.”
“그럼 오늘은 예외네요.”
“네. 아주 희귀 케이스.”
여주는 병을 한 모금 마시고는 카운터에 팔꿈치를 살짝 얹었다. 그 자세가 일처럼 익숙하면서도, 손님 앞에서는 조금 풀린 느낌이었다.
“보통 이 시간엔 혼자 정리하고 바로 불 끄거든요.”
“오늘은 아직 안 닫으셨네요.”
“짐 옮기느라 타이밍 놓쳤어요. 원래는 아홉 시 반쯤엔 닫는데.”
“그럼 제가 방해한 건가요.”
“아뇨. 방해였으면 아까 화분부터 같이 안 옮겼죠.”
그 말에 석진은 잔을 들어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달지도, 시지도 않은 애매한 맛이 입안에 남았다.
“이 동네 자주 오세요?”
“아니요. 어제도, 오늘도 우연이었어요.”
“우연치고는 연속이네요.”
“그러네요.”
여주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럼… 이 동네에서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은 저네요.”
“그렇게 되겠네요.”
“길 또 헷갈리면요.”
여주는 말을 하다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였다.
“전화 한 번 주셔도 돼요. 가게 번호 있는데.”
“그럼 하나 저장해도 될까요.”
“아, 네. 잠깐만요.”
여주는 카운터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석진 쪽으로 내밀었다.
“여기요.”
“임여주… 맞죠?”
“네. 꽃집 사장 임여주.”
“가게 이름 말고요?”
“굳이요?”
여주는 웃으며 말했다.
“전화 오면 알면 되죠.”
석진도 더 묻지 않았다. 저장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짧은 진동과 함께, 여주의 폰 화면이 깜빡였다.
“어, 왔네요. 석진 씨.”
이름을 부르는 발음이 자연스러웠다.
그냥 한 번 불러본 것뿐인데도.
“이제 진짜 길 잃어도 괜찮겠네요.”
“그쵸. 희귀 케이스는 기억해두거든요.”
8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석진은 습관처럼 거실 불부터 켰다. 낮보다 조명이 밝아지자, 창가에 둔 화분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아침에 나설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하루를 마치고 보니 잎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석진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 목록에 새롭게 저장된 이름 하나가 있었다.
꽃집 사장 임여주.
괜히 한 번 더 화분을 보고, 조금 떨어져서 각도를 맞춘 다음 사진을 찍었다.
조명이 너무 밝은가 싶어 한 장 더 찍고, 결국 처음 찍은 걸 골랐다.
잠깐 망설이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석진:
집에 잘 도착했습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창가에 뒀어요.
잠시 후,
생각보다 빨리 답장이 왔다.
여주:
오 잘 어울리네요
생각보다 자리 좋아요 👍
석진:
물은 아직 안 줬어요.
오늘은 괜찮겠죠?
여주:
네네 오늘은 그냥 두세요
흙 만져봤을 때 차갑고 촉촉하면 충분해요
석진은 휴대폰을 한 손에 든 채,다른 손으로 화분 흙을 살짝 눌러봤다.
…차갑고, 촉촉했다.
석진:
괜히 만졌다가 더 건드릴까 봐요.
잠깐의 공백.
읽음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떴다.
여주:
처음엔 다 그래요
그냥 생각날 때 한 번씩 보면 돼요
석진:
알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보기만 하겠습니다.
여주:
그게 제일 좋아요 😊
잘 키워주세요, 석진 씨
메시지가 끝나고,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석진은 휴대폰을 내려두고 한 번 더 화분을 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꽃도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 밤은, 어제보다 덜 비어 있었다.
9
그날 이후로 석진은 주에 두세 번, 퇴근길이 애매해질 때면 자연스럽게 그 골목으로 차를 몰았다. 일부러 시간을 비워둔 날도 있었고, 정말 우연처럼 들른 날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유가 분명했다. 물을 제대로 주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잎 색이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어서.
“이거요, 끝이 살짝 말린 것 같은데요.”
“아ㅡ“
“어제 히터 틀었죠.”
“…네.”
“그럼 범인 찾았네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고, 석진은 괜히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화분 이야기가 먼저 나오지 않는 날도 생겼다.
“오늘은 뭐 옮길 거 없어요?”
“아뇨. 오늘은 멀쩡해요.”
“그럼 괜히 온 건가요?”
“아뇨. 왜요? 그냥 구경해요”
가게 안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꽃을 보고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여주는 계산대 뒤에서 포장을 하거나, 물을 주거나, 흙을 갈았다. 둘은 각자 다른 걸 하고 있었는데,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화가 되는 느낌이었다.
“석진 씨 회사는 이 근처예요?”
“차로는 좀 있어요.”
“그럼 일부러 오시는 거네.”
석진이 살짝 미소를 띠며, 시선을 천천히 여주에게 고정했다.
“음… 일부러 맞아요. 여주 씨 보러 오는 거죠, 뭐.”
여주의 눈이 순간 커졌다. 입술은 살짝 벌어졌지만, 바로 숨을 고르듯 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손은 장갑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석진은 그 모습을 보며,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지만 눈빛에는 장난기가 살짝 배어 있었다. 그는 팔짱을 풀고, 한쪽 손을 카운터 위에 살짝 올린 채 몸을 약간 기울였다. 한편 여주는 얼굴을 잠깐 붉히고, 시선을 화분 위로 옮겼다가 다시 그에게 돌렸다.
“그… 진짜요?”
“그럼요.”
석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웃음은 작지만, 여주의 심장을 조금 빠르게 뛰게 할 정도로 은근했다.
“오늘은 꽃 옮기다 시간이 다 갔지만, 사실은 매번 올 이유가 식물 때문은 아니었죠. 나 나름 그래도 티 냈다 생각했는데.. ”
여주는 무심한 척 얼굴을 돌리면서도, 어깨가 살짝 올라가고 손가락이 장갑 끝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눈은 그를 바라보고 싶지만, 동시에 당황스러움에 조금 피하는 듯했다. 석진은 그 반응을 보며 작은 웃음을 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