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머리 아파.
"여주 씨."
너는 누구야?
"전 당신과 만난 적이 있어요."
기억이... 나질 않아.
"당장에 떠올릴 수 없다 해도 괜찮아요."
잠시만...
"제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나... 다시 머리가...
"기다릴 수 있어요."
......
"지금껏 줄곧 해왔던 일인 걸요."
그러니, 저는 아파도 견딜 수 있어요.


제 1장. 기억의 상실
없다. 없고, 여전히 없었다. '유여주'. S기업 인턴십 명단에서 끝내 이름을 발견치 못한 나는 모니터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보다 특출난 학생들이야 21세기에 널리고 널렸다는 걸 알지만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부모님의 조언대로 조급하지 말 걸 그랬다. 이제 곧 종강이고, 남는 게 시간이고... 하니.
그래. 흐늘해진 자세를 쫙 피며 언제 그랬냐는 듯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마우스 위에 덥석 손을 올렸다. 며칠 전 화학과 연구생 자리가 하나 남았다고 들은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던 탓이다.
같은 과 동기 중 하나인, 박지민. 본관에서 나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그가 이번 종강파티에 참석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소식은 들었다. 이미 공공연하게 과톡에 공지된 사항이고 그 많던 읽음 표시가 오후대를 기점으로 모두 사라졌으니, 지민은 아마 내가 그 일정에 소리소문 없이 불참할 계획임을 은연 중에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그랬듯이.
검은색 폴라티 위에 모던한 베이지 모직 코트를 걸친 그는 대답을 고르는 동안에 발을 맞춰 천천히 걸어주었다. 긴 다리에 비해 걷는 폭이 확연히 좁았으므로 슬쩍 바라본 모습은 조금 어정쩡하기도 했다. "너 보면 항상 뒷풀이 같은 데 빠지더라. 나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은 와 주지." 귀엽게 툴툴거리는 말에 나는 어떻게 대꾸하면 덜 무안할까 생각했다. 익히 알고 있다. 각자 할일 하기도 바쁜 시기에, 사회성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 챙겨주는 건 더이상 가식이 아닌 배려라는 것을. 박지민은 꾸밈없이 착하다. 그 사실을 인정한 지는 꽤 됐다.
"나 인턴십 지원했던 거 떨어졌어."
추위에 발간 코끝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란한 걸음이 거의 동시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소 뜬금없긴 해도 주제전환 감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래서 축 처져 있던 거야?"
"내가? 원래 뚱한 표정인데 나는."
"미묘하게 달라. 너만 모르지."
그러더니 두 손가락으로 제 입을 늘려 일자로 만든다. 이게 평소 표정이고. 뒤이어 우스꽝스럽게 입꼬리를 축 내리고는... 이게 지금. 하며 단호히 말한다. 그게 퍽 어이없고 웃겨서 나는 자리에 서서 한참을 킬킬댔다. 가만 지켜보던 박지민은 웃겼으면 됐다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안 올 거야?"
어째 잘 넘어가나 싶었는데. 노력이 무색하게 또다시 말짱 도루묵이다. 지민은 내 당황한 얼굴에 살풋 웃는 듯 하더니만, 이어진 고집스런 눈빛은 왜인지 꼭 확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집념 같았다. 언제 봐도 참으로 곰 같은 뱀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결국 그 소리 없는 성화에 못 이겨, 변명과 결이 비슷한 몇 마디를 덧붙여야 했다. 괜시리 손톱을 틱틱 괴롭히며.
"글쎄... 모르겠네. 사람 많은 데랑 잘 안 맞아서."
"그렇게 많이 안 올 거야. 장소도 가깝고 7시에 하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가면 다들 친해지고 좋지."
"그래. 생각은 해볼게."
"생각만?"
되묻는 한쪽 눈썹이 장난스레 올라갔다.
"...시간 되면 가고."
답하면서도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여러 방면으로 어색한 정정에 그는 웃었다. 되짚어보면 신기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웃는 것도 결국 체력소모일 터인데, 어떻게 저리 한결같이 밝을 수가 있는지. 이에 관해 따로 특강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마주칠 때마다 저 표정을 유지하는 게 가능한 건지- 따위의 자질구레한 생각을 했다.
아무튼 시간은 잘게 잘게 흘렀다. 이후 어디로 가냐는 물음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반대편을 가리켰고, 하여 얼어 있는 가로수길 중턱에서 우리는 자연히 흩어졌다. "잘 들어가." 하는 말에 마주 손을 흔들었다. 고교 친구들과 소모임이 있어 사거리쪽으로 나선 박지민과 달리 딱히 앞으로 계획이 없던 나는 집으로 곧장 걸음했다. 그의 약속 장소가 나란히 향하던 길목과 정확히 반대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머지않은 일이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봤다. 분명 인턴십 불통 따위는 내게 큰 파장이 없는 해프닝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까 지민의 말대로, 요즘에서야 기분이 유독 꿀꿀하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종일 어깨를 짓누른 가방을 집 한 구석에 벗어던졌다. 이제 방학이라고 마냥 침대 위를 뒹굴거리는 건 의미없는 짓이기에, 컴퓨터 앞에 눌러앉아 교수에게 보낸 메일을 재검토했다. 와중에 키보드 옆에 대문짝처럼 펼쳐둔 일기장이 거슬려 대충 책장으로 쑥 밀어넣었다. 그런데, 내가 일기를 썼었나?
"......"
모르겠다. 그저 이상하리만치 졸린 느낌이 들었다.

앨리스는 눈을 떴다. 예고도 없이 그녀에게 훌쩍 다가온 세상은 한결 채도가 낮은 어둠이었다. 왜 자신이 이곳에 멀뚱히 서 있는지, 왜 쓰지도 않은 목이 잔뜩 쉬어 있는지, 왜 이전의 아무런 기억이 없는지는 모르는 채 제 이름이 '앨리스'인 것만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각을 떠나 설정에 가까웠다. 애초부터 앨리스는, 앨리스이기 위해 이 세계에 오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이 덜 깨 몽롱한 기운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새까만 재가 흩뿌려져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저만치에서 드문드문 노랗고 하얀 불빛이 생겨났지만, 그것도 잠시, 앨리스는 제 발밑을 제외하고는 그 영롱한 파란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홀로였다. 눈물이 날 법도 했지만 나지는 않았다. 외로움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고파..."
그녀는 그대로 정처없이 걸었다. 주린 배를 붙잡고 씩씩하게 검은 들판을 헤쳐나갔다. 가끔 통이 넓고 거추장스러운 치마가 부서진 나무뿌리에 걸려 우왕좌왕할 때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걸린 부분을 한 겹씩 찢어내며 발을 디뎠다. 하늘은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 아득히 말갛고도 어두웠다. 별 대신 필사의 빛을 내뿜으며 죽어가는 해가 그 한가운데 떠 있던 것이 앨리스가 첫번째로 발견한 이곳의 이상한 규칙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껏 초라해진 행색의 앨리스는 어느 구역에 당도해서야 다른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볼품없이 찢겨진 치마의 끝단을 쥐었다. 낡은 갈색 망토를 둘러쓴 낯선 이가 선뜻 물어왔다.
"어디로 가시나요?"
앨리스는 답했다.
"모르겠어요. 어디든... 음식이 있는 곳으로요.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자, 낯선 이는 기다렸다는 양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마침 찬거리가 충분하기도 하고, 예쁜 아가씨가 이 시간에 홀로 국경 밖에 있는 건 위험하니까요."
"아아, 감사해요. 정말로요."
아무 의심도 없었다. 생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앨리스는 너무나 배가 고팠고, 이 적적한 거리에서 은인이나 다름없는 이를 만났으니, 차마 수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더랬다. 그가 손을 뻗자 앨리스의 하얗고 작은 손이 자연스레 그 위를 덮었다. 따라오라는 구체적 음성은 없었지만 남자는 눈빛으로 모든 걸 알려주었다. 멀리서 노란빛으로 형형한 오두막이 눈에 띄었다. 방금 전만 해도 한참이나 까마득했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앨리스는 순진무구하게 잡은 손에 이끌리면서도 원초적인 질문을 잊지 않았다. 일말의 경계라기보다는, 적어도 도움을 받을 사람이라면 이름 정도는 알아두어야 예의일 듯 싶었던 것이다.
키와 골격이 아니라면 언뜻 봤을 때 여자로 착각할 만큼 고운 눈을 가진 남자는, 그런 그녀의 말에 뒤를 돌았다. 달빛을 닮은 어슴푸레한 햇빛은 그의 콧잔등을 비췄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온다. 어떤 계절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앨리스는 지금이 아무래도 추수를 끝마친 시기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온갖 곡식의 향내가 코끝을 맴돌았다. 남자는 들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후에 말했다.

"흰토끼라고 불러주세요."
동시에, 오두막의 문이 활짝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