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남은 사실 집착남이었다
W. O형여자
단잠에서 깨어나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내 눈을 간지럽혔다.
이상하다, 내 방에는 햇빛이 잘 안 들어오는데.
이상한 것은 햇빛 뿐만이 아니었다.
내 침대가 이렇게 푹신했었나?
처음 느껴보는 푹신함과 포근함에 주위를 둘러본 나는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변한 것은 내 방 뿐만이 아니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닌 가늘지만 기품있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하녀처럼 보이는 차림의 여자가 서있었다.
“누구…?”
“서하 아가씨, 잠이 덜 깨셨나요?”
서하? 들어본 이름인데…?
“유서하…?”
“아가씨, 왜 아가씨 이름을 중얼거리세요?”
그녀가 나를 부르는 이름이 유서하라는 것을 확신한 즉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로 뛰쳐갔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누구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칠흑 같이 까맣고 홀릴 듯한 눈동자와 머리카락, 잘 익은 사과 마냥 짙은 붉은색을 띠는 입술.
거기에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사는 건지 부러질 듯한 여리여리한 어깨.
이 모든 것을 소설 ‘르레핀의 사랑’ 속 여주의 친구, ‘유서하’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르레핀의 사랑’에 빙의한 것이다.
빙의물 같은 거 보면 다들 엑스트라로 빙의하던데?
‘유서하’라면 주연은 아니지만 엑스트라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보통 로판 소설 속에서 아름다움의 수식어는 죄다 여주에게 때려박아 여주의 아름다움으로 전개를 이어가곤 하는데 이 소설은 다르다.
유서하는 르레핀의 꽃이라 불리는 르레핀 제일미녀이다.
오히려 여주인 김하린은 외모는 수수하지만 청초한 분위기로 남주와 서브남의 마음을 빼앗아버렸다.
백작 영애인 유서하는 매년 끊이지 않는 청혼을 받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을 믿어 항상 거절했다지.
(나는 이런 부분에서 이 언니 팬이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와는 달리 의외로 순수하달까? 사실 여주가 되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게다가…
“아가씨! 얼른 씻으셔야지요!”
“아가씨 생일 파티라서 치장이 더 오래 걸린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잠시만… 오늘이 유서하의 생일이라고?
오늘 유서하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면…
“저기…!”
“네?”
“그러면… 오늘…”
“전정국 후작께서도 오셔…?”
“그럼요! 최근에 후작가와의 거래가 있었잖아요!”
“후작님께서는 당연히 참석하시죠.”
전정국은 ‘르레핀의 사랑’의 서브남이다.
남주보다 여주에게 먼저 사랑에 빠졌고, 처음에는 여주랑 잘 되어가는 것 같아 당연히 전정국이 남주인 줄 알았는데…
다정한 김하린은 언젠가부터 티가 나게 전정국을 피했다.
그러던 와중 남주와 여주가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은 전정국은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더니 자결해버렸다지.
남주와 여주의 결혼 소식을 들은 전정국도 큰 충격을 받았겠지만, 전정국의 자결 소식을 들은 독자들은 어마무시하게 큰 충격을 받았다.
(서브파였던 나는 눈물 한 바가지를 흘렸다.)
이 엔딩으로 작가가 꽤나 욕을 먹었다지.
사실 독자들이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여주가 전정국에게서 멀어질 때부터였다.
이대로 결혼까지 하겠다 할 정도로 둘의 사이가 아주 좋았는데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한 여주가 기겁할 정도로 전정국을 눈에 띄게 피해다니니 작가가 회사의 협박을 받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전정국은 처음부터 김하린은 사랑한 것은 아니다.
사실 전정국은 오랫동안 유서하를 마음에 품어왔었다.
전정국은 유서하와의 접점을 위해 더 좋은 거래처를 놔두고 유의현 백작가와 손을 잡았다.
유서하의 생일이 되어 생일 파티가 열리자 당연히 전정국은 참석하였고, 그 파티 중 곤란한 일이 생기는데 김하린이 전정국을 도와 전정국은 점점 김하린에게 관심이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파티에서 전정국과 김하린이 만나지 않는다면?
유서하가 전정국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어쩌면… 전정국은 죽지 않을 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