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도 알고 장여주도 알고, 지나가는 개도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근 4년동안 이 학교를 잠시라도 거쳐갔다 치면 모를 길이 없는 유명인사가 가냘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석진의 옆을 스쳐지나간다. 아무렴 저런 샤방샤방한 갈색 똑단발 머리가 연화고에 어디 흔하겠냐마는.
최연수, 그녀가 누구인가 하면 말이다. a.k.a 화양고의 명실상부한 국민 첫사랑. 오죽하면 그 지독한 운명의 굴레를 천하의 김태형도 벗어날 수 없었겠나. 건축학개론 수지의 뺨을 여러 번 치는 청순가련 미모를 보유 중이신 그녀는 김석진과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 입교한 과학 선생이자, 과거 파릇파릇했던 1학년 김태형으로 하여금 고백 편지를 쓴다 뭔다 지랄쌈바를 추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이게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라는 것이 함정.
"태형아. 우니?"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진작 맘 접었다고 했잖아."
"진짜?"
"어."
"정말?"
"어."
"믿어도 돼?"
"아오 진짜..."
아니나 다를까 이 달콤한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여주가 슬금슬금 태형을 놀려댈 각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맞다 너 그때 기억나냐 발렌타인이랍시고 쌤한테 니가 만든, 읍!"
"......"
"으으음 으음! 음!"
"조용히 좀. 쌤 이쪽으로 온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듯 복도에 한참씩이나 덩그러니 남아 있던 석진이, 아주 푹 꺼진 감자같은 낯빛으로 저들에게 다가오는 것 아닌가. 그때서야 잊고 있던 임무를 떠올려낸 장여주가 제 입을 가로막은 손을 확 잡아내렸다. 야, 어떡해, 너무 가까워지는데? 피치를 한껏 낮춘 채 하는 속삭임에 그림자에 가린 태형이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들킬까 조마조마한 탓에 심장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듯했다. 마주쳐도 크게 문제될 상황은 아니지만, 몹시 번거로운 상황이 연출될 게 뻔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여주는 숨을 죽였다.
"야 뭐하냐? 쌤 벌써 갔어."
조금 뒤, 위에서 정수리를 툭툭 두드렸다.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던 모양이다. ...진짜? 진짜 갔어? 하는 상대에 무미건조하게 사람 말 좀 믿어라, 하고 손을 내민다.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로 태형이 내민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킨 여주가 틈새에서 삐져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로 남아 있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듯해 보였다. 애초에 옥상 바로 밑층은 왕래가 드무니까 말이다.
"아무도 못 봤겠지?"
"쌤들 다 내려갔어. 내가 봄."
어, 그래... 우리도 가자. 대답하면서도 장여주는 맥이 탁 풀려 계단 손잡이에 질질 끌려가는 양 걸어내려간다. 그 뒤를 태형이 따르며 한 마디 얹는다.
"이러는데 탐정 하겠냐? 포기하고 공부나 하지?"
"근데 너 아직도 연수쌤 좋아해?"
"그만하자."
"오키."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만 남은 대화였다.

연화고 추리 3반
ep3. 돈보다 소중한 (3)
그렇게 태형의 짝사랑 그녀의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우여곡절 끝에 동아리실로 되돌아온 장여주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부장석에 착석했다. 여기서 부장석이라는 건 동아리실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중앙에 보이는 '추리동아리 부장 장여주의 상석'라는 것이며 그녀를 제외한 다른 부원 1명의 동의는 필히 얻지 않았으나 그럭저럭 굳어진 아무튼 아무때나 무게 잡기 좋은 자리였다. 의자를 서너 개 일렬로 겹쳐 그 위에 드러누운 김태형이 그런 그녀를 빤히 노려보며 말했다.
"긴급소집은 진짜 지랄인 것 같아."
"욕설 경고 1회."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 학교 끝났는데 내가 왜 여기 있어야 되는데?"
"그거야, 오늘 하루종일 쌤 기분이 안 좋아보이셨으니까."
"내 기분도."
"연수쌤이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야, 찾으라는 지갑이나 찾아. 애먼 데 한눈 팔지 말고."
지갑? 태형의 비아냥에 불현듯 여주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석진쌤은 어째서 지갑을 찾으려 했던 걸까. 그것도 우리 추리 동아리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펜을 테이블에 탁탁 두드렸다. 거듭 생각해 봐도, 거기에 무슨 귀중품이 든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찾을 이유가 없었다.
"잃어버려선 안 되는, 그러니까... 전에 말했다시피 첫사랑 사진 같은..."
"뭐?"
"아."
장여주가 번뜩 부장석을 박차고 일어난다.
"연수쌤이랑 관련 있는 게 아닐까?"
때맞춰 태형의 한쪽 눈썹도 꿈틀댔다. 어이가 없어서, 가 물론 주된 이유다. 어쩐지 아까부터 저가 연수쌤을 좋아하느니 마느니 노래를 부르더니, 얘는 아마 징하게 누구랑 누굴 엮고 싶어서 돌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얘기만 좀 하면 다 핑크핑크 사귀는 건 줄 아나. 더 들어줄 까닭이며 가치가 없었으므로 김태형은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싸그리 무시한 채 의자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먼저 간다."
"야, 어디 가! 방금 진짜 중요한 단서를 찾았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슨 그 둘이..."
벌컥!

"저기... 미안한데 얘들아-"
"석진쌤...?"
"쌤 마침 잘 오셨네요. 장여주 얘가 뭐라는지 아세요?"
"야 너 돌았...!"
"쌤이랑 연수쌤이랑 둘이 뭐 있대요. 와 나... 쌤이 들어도 진짜 웃기지도 않죠? 그쵸?"
"......"
"......"
"진짜 참, 웃기지도..."
"......"
"......"
"진짜..."
어째서 대답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지, 그것은 태형의 의도치 않은 확인사살에 아주 빨갛게 잘 익은 석진의 얼굴로써 설명되었다.
"설마."
설마가 기어코 사람을 잡은 날이다.
***
"죄송합니다 얘가 생각이 없어서..."
"아니... 아니 괜찮아. 어차피 너희들만 아는 건데 뭐..."
늦은 오후의 해가 뉘엿뉘엿 지는 창밖을 보며 석진이 물을 원샷했다. 아무래도 의도치 않게 비밀이 밝혀진 꼴이니 속이 타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죄인 김태형은 스스로 아가리를 봉한 채 옆에서 조용히 손을 모으고 있다.
"그게... 저희도 막 생각한 건 아니고. 실은 오늘 여쭤볼 게 있어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연수쌤이랑 얘기하시는 걸 봤어요."
"아... 그때."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아서 숨죽이고 있었거든요."
"......"
"쌤."
"어, 응?"
멍하니 손끝만 매만지던 석진이 여주의 부름에 고개를 쳐든다. 지갑이랑 연수쌤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찾으시는 거고요? 그와 함께 알고 지낸 지도 벌써 1년 반, 준비해온 아재개그가 차갑게 씹히는 한이 있더라도 매사 밝은 표정을 유지해오던 석진이 근래에 상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구는 것은 분명 단순히 지갑을 잃어버리고, 다른 선생과 불화를 빚었기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 둘 사이에 어떠한 거대한 연관점이 있지 않은 이상 이 추리를 완벽히 끝맺기 어려울 거라고 본 여주이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그에게 묻는 것이었다.
"근데 이거...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않을 거지?"
"코난 20주년 한정판 브로치를 걸고 맹세해요 쌤."

"여주는 그렇고..."
석진의 고개가 미심쩍게 태형 쪽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제일 걸리는 건 역시 김태형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리고 김태형의 크로스본 건프라 3종을 걸고 맹세해요."
"야 누구 멋대로..."
"니 모가지를 걸든가 그럼."
"...쌤 저도 맹세."
"어... 그래 고맙다..."
협의 끝에 진한 언약을 받아내고서야 석진의 입은 천천히 열렸다. 그 과정을 지나서야 드디어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얘기하면서도 '이런 걸 너희한테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추리부 부장의 격려를 빙자한 자백 기술로 그는 결국 모든 걸 털어놓아버리게 되었다. (김태형은 이후 이를 말고문이라고 명명했다) 그렇게 퇴근한 석진을 제외하고 다시 두 명만이 동아리실을 차지한 상황 속에서, 여주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휴. 이제 집 가도 되는 거?"
"가자."
"아 드디어..."
"지갑 찾으러."
"뭐?"
꺄악-! 오직 짧은 비명만 남긴 채, 김태형은 사라졌다는 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