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트로피컬 미드나잇
#01_너 진짜 잔인하다.


소파에 털썩 몸을 맡기고 빈속에 깡소주를 들이부었다.


김동현
-전웅 그 망할 새끼가….

술을 멀리하던 그지만, 가장 마음을 주었던 사람의 배신에 기댈 수 있는 건 사람이 아닌 것뿐이었다.

투명한 술잔에 투명한 술이 쌓였고 동현의 얼굴은 붉어져만 갔다.


김동현
-형, 내가 뭐가 부족했던 건데.

전웅은 김동현에게 상당히 많은 사랑을 읊었다.

김동현은 그랬던 전웅의 사랑에 항상 고마웠고 사랑스러운 이에게 그만큼의 것을 돌려주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단 하루 아침에 사랑을 갚아줄 사람이 사라졌다. 700일이라는 기념일을 일주일 앞둔 채.

목표가 사라졌고 추억을 사라지게 해야 하는 절망감에 눈물을 쏟았다.

전웅이라는 두 글자만 하염없이 서글프게 부르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동현은 핸드폰을 켜 전웅과의 대화 내역을 쭉 읽었다.


김동현
-형 진짜 잔인하네.

사랑한다는 말은 끝없이 많았고 애정이 묻어 나온다는 사실은 잔인했다.

유리창에 물이 떨어져 밖이 흐려지듯 그의 시선도 흐릿했다. 빛이 번지고 일그러졌다.

그리고 유일하게 선명했던 한 마디.

-나중에 형이랑 보라카이 갈래? 너랑 여기 가는 게 내 평생의 꿈이야.

보라카이, 전웅이 귀가 아프도록 떠들어댄 그의 꿈.

한낱 여름의 시작점, 밤의 취중이었다.

전웅이 같이 이루자던 꿈을 홀로 이뤄내 작지만 절망을 안겨주고팠던 젊은 날의 취기.

약 3년이란 시간 동안 보라카이에 가기 위해 조각조각 돈을 모았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던 작은 복수를 실천하기 위해서.


김동현
-형, 보라카이에 왜 그렇게 집착해요?

제 품에 안긴 웅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물었었다.


전웅
-이유는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랑은 로망 있는 곳에 가야지. 우리 둘 다 안 가보기도 했고.

망할 과거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김동현
-전웅은 나를 계속 사랑하고 보라카이에 같이 가는 지독한 꿈을 꾸길.

.


3년간의 노력 끝에 보라카이에 발을 올렸다.

한국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작은 공항을 지나 아기자기한 길거리를 걸었다.

내리쬐는 태양과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금이 가고 열기를 머금은 길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도마뱀에 소리를 질러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셀카봉에 핸드폰을 매달고 웃음을 띤 채 호텔을 향해 걸었다.


전웅
-어? 김동현.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동현을 발견하곤 눈물을 삼켰다.

3년 전보다 성숙해지고 더 밝아진 모습이었다.

차마 그를 부르지는 못한 채 비릿하게 웃었다.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밤이 되자 식당은 클럽이 되었고 동현과 웅은 이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재즈풍의 노래들을 즐기며 웃고 있을 때, 불편한 상대와 눈이 마주치고는 표정이 굳었다.


전웅
-뭐야, 김동현.


김동현
-형은 그럼 뭐예요?

김동현은 어이없어 웃음을 흘렸고 전웅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한 채 그에게 다가갔다.


전웅
-우리 이 정도면 운명 아냐?


김동현
-글쎄요.

눈을 피하며 쓴 술만 홀짝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웅은 전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전웅
-너 여기 온 이유가 뭐야?


김동현
-말할 필요는 없죠.

웅이 동현에게 한걸음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경직된 동현의 손을 잡아올린 뒤 제 귀에 댔다.


전웅
-너 나랑 키스할 때마다 꼭 왼쪽 귀 막았던 거 기억나?

동현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저 형은 지금 미쳤다.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인간이 몇 잔이나 들이켰으니.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자리를 피했다. 애초에 전웅에게 상처를 주는 게 몇 년짜리 계획의 목적 아니었는가.


전웅
-동현아, 가지 마.

옷깃을 잡은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았다.


김동현
-형, 우리 관계는 형으로 인해 작살난 거예요, 알죠?

웅의 입술이 미세하게 동현의 입술과 닿았다.

숨결 자체가 고스란히 느껴질 위치.


전웅
-너도 나 못 잊었잖아, 그치?

전웅을 밀쳐내고 표정에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도록 애썼다.

자신감 넘치게 당당한 말, 아까와는 달리 눈물 맺힌 바보 같은 모습.


김동현
-첫 계획 일정부터 망치지 말아요, 우리.


전웅
-넌 내가 싫어?

동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웅과 눈을 맞췄다.


김동현
-형은 지금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전웅
-너, 그냥 김동현 그 자체. 네 마음이던 몸이던 뭐든 다 나만 향했으면 좋겠어.


김동현
-형은 그랬고?

칵테일 잔을 비우고는 웅의 입에 짧게 입을 맞췄다.

체리 칵테일이 흘러 입속에 들어왔다. 달달하고 씁쓸한 맛이 희미하게 퍼졌다.


전웅
-너 진짜 잔인하다.


김동현
-형은 어땠는지 생각해요. 술 취한 사람한테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갈게요.

동현은 유유히 클럽을 나왔고 웅은 그가 있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 쾅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전웅
-존나 잘생겼어, 짜증 나게.

밝은 보름달이 창을 통해 보였고 그 아래 가만히 앉아 바다를 보는 동현을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