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에필로그 (10) 그 후, 석진 이야기 (1)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석진은

가지고 온 케리어들을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둔 채,

잠시 자신의 책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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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역시 내가 문제였을까...'

방금 전 만났던 여주의 지친 모습에 석진은 마음이 아팠다.

석진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면서 어린 시절의 여주를 떠올렸다.

석진이 일을 하게 되면서, 첫 월급을 받자마자 향했던 곳은 보육원이었다.

처음에는 그 때 봤던 여주에 대한 고마움으로 정기 후원을 하기 시작했다.

보육원에 있다가 가출을 했던 석진은 자신의 작은 보탬이 보육원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랬다.

후원을 시작하자 보육원 재단에서 나오는 소식지 등이 우편으로 오면서,

석진은 보육원 행사라던지,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던지 하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번 돈이 어딘가에 쓰인다는 것이 뿌듯했던 석진은

큰 행사를 도우러 가면서 보육원과도 연을 쌓게 되었다.

그 날도 행사를 도우러 갔던 날이었다.

석진은 박스를 들고 가다가 한 두해 사이 부쩍 커버린 여주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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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주

아저씨, 생활관이라서 여기 오시면 안되는데요...?

어린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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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아, 이거 행사 때문에 식당에 갖다둬야 하는데 어디인지 알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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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주

알려드릴테니까 따라오세요...

여주는 여전히 말을 똑부러지게 하며 행동이 명확했다.

석진은 문득 여주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뭔가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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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주

아저씨, 또 만났네요..?

이후 몇 번 우연히 마주친 여주는 석진을 늘 아저씨라고 불렀다.

여주에게 아저씨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 노숙자였던 자신이 생각나서 석진은 약간 불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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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어.. 저.. 내가 아직 아저씨보다는,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거나, 오빠라고 불러주면 어떨까..? 내가 대학은 안 다녀도 지금 나름 대학생 나이거든..?

석진은 혹시 자신의 옛 정체를 여주에게 들킬까 걱정이 되어 괜히 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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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주

그럼... 선생님은 좀 그렇고 석진오빠..?

이후 여주는 석진을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여주와 석진은 조금씩 더 친해졌다.

어느 날, 석진은 일 때문에 인천 부둣가의 어느 낡은 창고에서

중국 쪽 조직을 만날 일이 있었다.

원래 석진은 채권자만 찾을 뿐 직접 만날 만한 일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채권자가 돈 대신 지불하겠다는 뭔가를 받으러 가게되었다.

그 조직은 매우 조심스러워서 석진은 몇 번이나 그 곳을 방문해야했다.

해외에서 온 조직원들은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때문에 더욱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석진은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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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그럼 말씀하신대로 이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마침내, 석진은 건네받은 가방을 들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길에 어두운 그림자에 숨어있던 누군가가 계속 따라오는 온다는 것이 느껴져서,

석진은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부둣가의 여러 창고들 사이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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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이제 슬슬 나오지 그래..?

조직원이 있던 곳을 벗어나, 근처의 공사 중이던 건물 안으로 미행자를 유인한 석진은 서서 가만히 상대가 정체를 드러내길 기다렸다.

석진의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의외로 작은 꼬마 여자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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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조직원들 사이에 있을 땐 체구가 작은 여자인줄 알았는데, 그냥 어린 여자애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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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윤

please....저.. 저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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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응..?'

아깐 분명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말했던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하자 석진은 살짝 놀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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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윤

구.. 구해주세요... 부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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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

무엇이었을까....

순간적으로 석진은 윤의 눈빛 속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살기위해 아둥바둥해야하는 그런 처절함이 느껴졌다.

석진은 고등학교 때 막 집을 나와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그래도 무던히 애썼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그 어린 여자아이의 눈빛 안에 비춰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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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조용히... 그럼 아까처럼.. 그림자 속에서 날 따라올 수 있겠니..?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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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내가 타고 온 오토바이가 있어... 신호하면 바로 뒤에 올라타, 알았지?

석진은 아이에게 말한 뒤 바로 자신이 세워둔 오토바이로 향했다.

아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실짝 곁눈길로 확인하면서 석진은 골목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부우우웅~~~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날렵하게 뛰어와 뒤에 올라탔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헬멧을 아이에게 씌워준 석진은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출발하였다.

일단.. 석진은 여자아이를 숙소에 데려오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같이 쓰는 곳이어서, 이 곳에 아이를 숨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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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일단 너에 대해 이야기해줄래...?

윤은 석진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석궁과 총 등을 모두 꺼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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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윤

난.. 우리 조직의 킬러야. 그렇게 키워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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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국말 못 하는 척했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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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윤

프랑스에 있는 날 키워준 아저씨가 한국에 오면 도와줄 사람이 있을 꺼라고... 도와달라고 하라고 했어..

자신이 16살이라고 밝힌 아이는 더이상 사람 죽이는 일을 할 수 없다며.. 자신을 한번만 도와달라고 했고,

석진은 윤을 책임지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이 여주와 같은 나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석진은 보육원이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

몇 해동안 종종 만나며, 제법 신뢰감이 쌓인 원장수녀님은 석진의 급한 연락에도 불구하고

윤이를 만나보기로 하셨다.

석진은 윤이의 신분 때문에 많은 걱정이 있었다.

위조 신분을 만드는 것이야, 위조신분을 역으로 추적하던 일을 하던 석진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숨어지내며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윤에게 제대로 된 신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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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수녀님

석진선생님, 말하자면 윤이가 무연고자인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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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네.. 그런 것 같아요.. 윤이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제가 어떻게든 돕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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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석진

윤이를 부탁드려요..

석진은 윤이 킬러라는 사실은 전달하지 않았다. 그 때 석진의 생각에는 그 부분은 윤이를 위해 잊혀져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윤이가 어릴 때 해외에서 납치되어 어떤 조직에서 길러졌고, 각고의 고생 끝에 한국에 온 부분은 자세히 전달했다.

수녀님은 석진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윤을 도와주게 되었다.

다음날 수녀님은 윤이를 여주에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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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수녀님

윤이가 아직 한국말도 서툴러..... 여주가 윤이를 도와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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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주

네~ 그럼요:)

여주가 흔쾌히 윤이와 잘 지내겠다고 했고, 석진은 이때 여주에게 빚을 진 느낌을 받았다.

윤이를 구해준 이후 얼마 안가 석진이 속해있던 사무실이 김남준 검사에 의해 와해되면서,

다행히 석진은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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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검사

김석진씨... 지금 이 곳에서 한 일들을 모두 인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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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네.. 제가 사실.. 이 일이 불법인 줄은 처음에는 잘 모르고 시작했어요. 아니, 그런 부분은 제 고려사항이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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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고등학교때 집을 나왔다가 노숙자가 되었고.. 노숙자 신세를 벗어나고자 했을 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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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그래서.. 일을 제안 받았을 때 바로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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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검사

같이 있던 다른 분들과는 달리 김석진씨께는 독특한 부분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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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검사

보육원에 단독 후견인으로 계신 아이가 있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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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검사

정기적으로 후원하신 지는 더 오래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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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지금 후견인으로 있는 아이는 저처럼 어릴 때 부모랑 헤어지고 연고가 없는 아이라서 제가 나서서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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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보육원에는 제가 노숙자 신세를 벗어나고 싶은 계기가 된 아이가 있어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후원을 시작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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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검사

그렇군요...

석진에게 흥미가 생긴 남준은 이후 석진이 하던 일들을 자세히 찾아보았고,

실종처리된 사람을 찾는 등, 석진의 뛰어난 능력이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남준은 석진이 형을 사는 대신 근무를 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제도 입니다...해외에는 형기 대신 위조지폐 추적, 마약관련 범죄 등의 특수한 사건들을 돕도록 하는 제도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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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형사

오~ 좋아요... 석진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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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형사

이번 사건 푸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정형사는 석진의 추적에 감탄을 했다.

석진을 통해 미제에 빠질 뻔한 사건이 또하나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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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형사

석진씨.. 이 쪽 일 계속 도우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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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아 뭐.. 저야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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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제가 하던 것들이 바람직하게 쓰일 수 있다니... 저는 좋습니다.

이후 정형사는 김검사에게 연락하여 석진이 꾸준히 일할 수 있도록 하였고,

석진은 김남준 검사를 통해 자신이 좀더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너무나 고마웠다.

이후 여러가지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석진은

윤이 핑게로 여주와 셋이 자주 만나며, 아이들의 생일이나 입학, 졸업식을 챙겨주며 지냈다.

대학을 붙은 여주가 경제적인 이유로 입학을 포기하려 했을 때에도

원장수녀님을 통해 몰래 여주의 대학생활을 후원하며 여주에게 더욱더 신경쓰기 시작했다.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