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물방울
19_이유 #있어, 아직은


[예린 시점]

이게 뭐지, 삶에 있어 굉장한 실망감이 든다.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해져버린 행복했던 시절,

미래를 기대했던 시간,

현재에 충분히 만족했던 순간,

이제는 너무 멀어져서 손 뻗어도 닿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보이지가 않는다.

그냥 요즘은 그거다,

행복따위 그리워하지도 않고,

괜찮은 것도 이젠 포기하고 있고,

그냥 이 어둠을 끝내는 것.

컴컴한 이 삶을, 휘청이는 나를,

그냥 내려놓아버리는 것.

더는, 숨쉬어서 할 것도 없고

내가 굳이 숨 쉬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으니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

좋은 음악을 듣고,

음악에 위로받는 거 다 됐으니까

노래하고 춤 추고

뭔가에 노력하는 거, 다 필요성을 잃었으니까

그냥 다 포기해버리고, 내려놓아버리고

다시는 없길 바라는 다음 세계로 넘어가

다 잊고, 새롭게 숨을 쉬는 것.

다음 세계로 넘어가지 않아도 된다.

새롭게 숨쉬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제발 지금 겨우 매달려있는 절벽 끝에서

그냥 저 밑 낭떠러지로 떨어져버렸으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던걸까

항상 밝았던, 긍정적이었던 정예린은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나 원래 안 이랬는데,

내 삶도 안 이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하나 망가져가기 시작했을까

멍하니, 침대에 반쯤 누워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흐르는 멜로디를 듣는다.

귀와 이어폰 사이, 작은 틈으로 스며드는 말소리들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 소리를 크게 틀고서는

가만히 눈을 감아낸다.

그때,

엄마
정예린!!!!!!


정예린
..하아

왜인지 집에서 내 이름이 불리면 한숨부터 나온다.


정예린
..왜..?

엄마
뭐하고 있었어, 방에서?


정예린
그냥.. 노래 들었어

엄마
공부는 했어?


정예린
응, 오늘 할 거 다 풀었어

엄마
그거 외엔 더 안 해?


정예린
..어?

엄마
그게 얼마나 된다고 그거만 하고 말아, 뭐 좀 더 해

문제집을 사주든지, 말을 말든지..

문제집을 사주지도, 살 돈을 주지도 않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건데..

아빠
책도 좀 읽어라


정예린
응..

방으로 들어와 소리없이 방문을 닫는다.

그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빡세서,

아침에 눈이 떠지고, 숨이 쉬어지고, 그렇게 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지럽고 지쳐서, 더는 뭘 할 수가 없을것만 같은데

엄마아빠는 자꾸만 나에게 뭔가를 더 해내라고 하고

나는 또 아무 말 못하고 수긍해야 한다는게,

사람을 미칠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해낸다해도 돌아오는 건 따스한 말 한 마디가 아닌 당연시 여기는 행동들.

내가 한 노력을 깔보고 낮게 보는 말들.

그리고 날 바라보는 차가운 눈빛.

해내지못하면, 경멸과 비난을 받아야하고

해내면, 당연함과 새로운 해내야 할 과제를 받고.

결국 결말은 똑같다.

나는 상처받고, 지치지만, 쉴 수는 없다는 거.

또 나 혼자 숨겨야 한다는 것.

또 나는....

의도하지 않아도 혼자가 되어버리는 것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아무 글자나 끄적이다 보니,

어느새 창 밖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집 안에서도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는 끊겨있었고

그렇게 나는 " 나의 밤 " 이라는 시간에 휩싸이는 것을 허락했다.

항상 내 안에서 읊조려지는 말에 귀를 기울여봤다.

근데, 뭐, 다 신세한탄 같은 거더라.

난 왜 태어났을까,

난 왜 살까,

눈은 왜 떠지고 숨은 왜 쉬어지며

왜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못할까,

삶이란게 원래 이런걸까,

미칠 것처럼 힘들다.

순식간에 써내려져 가는 이 말들이 내 가슴 속에서, 매일을 떠다니고 있다.

그러다, ' 수고했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이내 나는 현실을 자각했고 눈물은 온데간데 없이 말라있었다.


정예린
허...ㅋ

어이가 없었다.

현실이 뭐라고, 삶이 뭐라고,

이런 위로 한 마디에 눈물 흘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걸까 싶어서.

차라리 이유라도 몰랐으면 더 나았을까, 싶었다.

지금은 이유를 아니까, 뭘 해야할지 알겠는데,

그걸 실현하지를 못하니까, 그게 더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힘든 이유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알아도 몰라야 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유를 모르면, 적어도 지금보단 나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럴거라 확신했었는데,

그건 나의 큰 오산이었다.

[19_이유 #있어, 아직은]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