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물방울

20_이유 #없어, 이제는

[예린 시점]

분명히 이렇게 처참해진 이유라도 모르면,

그러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 확신했고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며칠이, 몇 개월이 지났다.

딱히 긴 시간도 아니었다.

길어봐야 2~3달?

그 시간 안에서 나는, 내가 그리도 바랐던,

이유없는 힘듦을 받아내었다.

이유를 알 때보다 더 괜찮아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답답했다.

차라리 몇 개월 전이었으면, 싶었다.

실현은 못해도 해결법은 알게,

맞서진 못해도 원망이라도 하게,

이제는 내가 이리 망가진 이유를 잃어버려서

해결법을 모르는 것은 물론, 맘대로 원망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원망할 사람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 모든 걸 반항 없이 받아내고,

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고만 있는 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미웠고

원망할 사람도 모르는 내가 바보같았고

그런 나를 미워하는 나는 더 싫었다.

날 이렇게 만든 누군가보다도,

내가 이렇게 될 동안 바라보기만 했던 세상도,

그 외의 어둠들도 다 싫지만,

그 와중에도 " 나 "를 가장 미워하고 싫어한다는게,

너무 비참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도 서서히 미쳐갈 수 있구나, 깨달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 미칠 것 같아 " 가,

" 미친 것 같아 " 라고 변해있더라ㅎ

그만큼 난 미칠 것 같았고, 이미 조금 미쳐버렸고,

그만큼 더더 깊은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가기만 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 죽음 '이나 ' 아픔 '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남몰래 매번 움찔거렸다.

지겨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니까.

어두컴컴한 밤이 시작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그 후에는 책을 읽기도, 그냥 글씨를 끄적이기도 하며

금같다는 시간을 어영부영 보낸다.

정예린 image

정예린

하아 - ..

속에 있는 마음들을 조금씩만 떼어내 끄적이던 글씨 위로 덮어지는 한숨.

하루동안 힘들게 막아내었으니, 지금이라도 마음껏 뱉어보려

붙여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을 막지 않는다.

그러자 쏟아져나오듯 짧은 간격으로 튀어나오는 숨들이었다.

정예린 image

정예린

...

뱉어진 숨들 밑에 깔린 글씨들을 찬찬히 읽어내다,

문득 창가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눈에 들어오는 아파트와 그에 속해있는 간간히 한 두집 켜진 불.

아파트 옆으로 빼꼼 나와있는 검보라빛 하늘과 별 하나 없이 외롭게 떠있는 달.

주황빛을 내보이는 가로등.

모든 것이 고요하고 편안해보였으나,

단 하나, 내 마음만은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늦어지고, 하나 둘 사라지는 불빛에 점점 나를 닮아가는 어둠.

그 과정을 바라보며 마침내 깜깜해진 창 밖에 나는 조용히 스탠드 불을 켰다.

이유가 사라지고부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암흑.

내 몸을 서서히, 이제는 완전히 덮어버린 피 맺힌 상처들.

나 혼자 생각할 때도 튀어나오는 말에는 피 비린내가 묻어있는 듯 했다.

나를 집어삼킨 고통은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고,

오직 " 죽고싶다 "는 생각만을 띄웠다.

이대로는... 살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애쓰며 발버둥칠 이유가 없었다.

아픔의 이유를 잃어버렸음에도 이유부터 찾는 내가 한심했고,

별 망설임 없이 베게 밑에 넣어두었던 커터칼을 꺼내들었다.

칼날에 맺혀버린 핏방울을 보고도 별 생각은 들지 않았고,

익숙한 듯 눈치를 한 번 슥 - 보더니 왼쪽 소매를 거둬내는 나였다.

천천히, 빨간 점을 잇는 선분을 그려냈다.

약간의 통증은 있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통증을 참아내면, 죽는다는 생각에 후련해졌으니까.

막상 그렇게 깊고 선명하게 긋지는 못했지만,

나날이 겹쳐 그어지는 선분들에 점점 흉해져만 가는 내 손목이었고

바라보기 싫었지만, 자칫 들키기 쉬운 부분에 그을 수 있어 억지로라도 바라보며 선분을 그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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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린

나 왜, 죽고싶다면서, 정작 죽지는 못하는거지?

나도 모르는 곳에 미련이 남은 걸까,

그동안 발버둥친 게 억울했던 걸까,

버텨온 시간이 아까웠던 걸까.

딴 건 몰라도, 미련이 남은 거라면 정말 어이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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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린

다 상처받아놓고... 미련 남을 곳이 어디있다고..

짐작이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조금 걸렸지만, 못 죽을 정도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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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린

아리인가?

아리라면 그럴만 했다.

내 선 안으로, 조심히 천천히 내 허락 후에 들어와준 유일한 사람.

정말 인간다운 인간.

나를 이해해주고 다독여준, 지금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준 사람.

아리라면, 충분히 내 죽음을 붙잡을만한 요소가 되었다.

아무래도 온라인상으로 만났다보니 다른 애들에 비해 소통률이 낮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는 나에게 " 살아야할 이유 "가 되었다.

정예린 image

정예린

..하아 -

다시금 튀어나오는 뭉텅이의 숨에,

눈길을 도로 글씨 위로 옮겨냈다.

지쳐갈 뿐이었다.

끝없는 암흑에 갇혀

맞는지도 모르겠는 길을 달려낼 뿐이었다.

얼마 전엔,

" 조금 쉬면 나을텐데 "하는 게 있었지만

더 지쳐버린 지금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무슨 미련인지 죽지 못했고

죽지 못해서 또 달릴 뿐이었다.

정말 그 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더라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쉴 틈조차 주지 않음에 나는

어떨 땐 숨을 짧게 나눠 뱉었고

어떨 땐 숨을 참기도 하며 계속계속 달려냈다.

그렇게 달렸는데도 끝은 없었고

나는 종점의 유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내 상황에선, ' 더 나아짐 '따위는 없었고

' 더 나아짐 ' 대신 ' 더 나빠짐 '이 날 맞이했다.

그게 다였고,

겨우 그것들이 나를 죽을 만큼 괴롭혔다.

그냥... 그 뿐이었다.

[20_이유 #없어, 이제는]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