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가족
러브 미로 12


김석진의 손에서 힘이 조금 풀리는 순간,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와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문을 틀고 무작정 세수만 했다.

여주
"아윽⋯⋯."

오른쪽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 김석진에게 붙잡혔던 어깨였다.

나는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헤치곤 오른쪽으로 열어젖혔다. 손바닥 모양으로 붉게 물든 자국.

여주
"⋯⋯개새끼."

쏴아아-

틀어놓은 물줄기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셔츠가 물에 다 젖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김석진이 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행동한 건 처음이다. ⋯⋯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한성 그룹을 언급한 것도 처음이고.

맞고 있던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니 엄마가 생각나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참을 수 없었지만⋯⋯ 참아야 했다.

어차피 이 집안의 내 보호자는 없으니까. 그저, 잠시⋯⋯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죄책감을 이용해 머무는 거니까.

쾅!

여주
"⋯⋯!"

깜짝이야. 유리가 깨질 정도로 벌컥 열린 문에 놀라 뒤를 돈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보고 더 놀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김태형
"나와."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김태형이었으니까.

여주
"너 이게 무⋯⋯ 아니, 여길 들어오면 어떡해. 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김태형
"알아. 그러니까 빨리 나⋯⋯."

기분 탓인가. 김태형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가더니 세상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김태형
"⋯⋯너, 다쳤어?"

여주
"⋯⋯아."

너무 갑자기 들어와서 잊고 있었다. 나는 김태형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리며 손을 올려 빠르게 단추를 채웠다. 단추를 채우는 와중에도 김태형의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더 속도를 빨리 했다.


김태형
"김석진이지."

여주
"너, 빨리 나가. 나랑 아는 체한 건 둘째치고 여기 여자 화장실이라니까. 내일 아침에 뉴스 나오고 싶어?"


김태형
"이미 다 틀렸어. 도대체 김석진이랑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너."

여주
"말을 똑바로 해. 앞뒤 잘라먹고 그따위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


김태형
"너, 한성 그룹 사람인 거 다 퍼졌다고."

여주
"⋯⋯뭐?"

넥타이를 메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거울을 통해 김태형을 보던 눈도 몸을 똑바로 돌려 김태형의 얼굴을 바라봤다.


김태형
"근데 소문이 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서 일단 남준이 형이랑 상의를,"

여주
"어떻게 났는데. 설명하고 가."


김태형
"하⋯⋯."

한숨을 쉬는 김태형의 표정이 많이 답답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따위 배려할 여유가 없다. 그토록 숨기던 정보가 알려졌다는데, 그 정보의 당사자가 나이니 보통 조급한 게 아니었다.


김태형
"약혼 관계."

여주
"⋯⋯뭐?"


김태형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우리 셋 중 한 명과 오래 전부터 약혼한 사이인데 김석진이 반대한다는, 야! 어디 가!"

나는 김태형의 말을 듣다 말고 급하게 화장실 문을 열어 복도로 빠져나왔다. 아까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누군가 보고 퍼트린 거다. 틀림없다.

불과 1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미 학교에는 소문이 퍼진 듯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모세의 기적과 같이 갈라지는 무리 사이로 달리듯 걸어가 교실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는 박지민만 아니었다면.

여주
"비켜."

문 앞에서 바로 비켜서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박지민의 팔을 밀려했지만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앞으로 한 발 나오는 바람에 막혀버렸다.

'얘는 또 왜 이러는 거야.'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데 마음 같지 않게 구는 박지민 때문에 화가 났다.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팔 대신 멱살을 잡아끌어내리니 그대로 박지민의 얼굴이 끌려내려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에 멈추니 박지민의 눈동자가 눈앞에서 바로 보였다. 순간, 알고 있던 것보다 꽤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놀라 움찔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을 이었다.

여주
"지금 너 상대할 기분 아니야. 잔말 말고 비,"

그리고 그때, 유지하고 있던 박지민과의 거리가 훅 짧아졌다.

박지민
"⋯⋯잠시만."

여주
"⋯⋯!!!!!"

순식간이었다. 박지민이 내게 입을 맞춘 건.

입술에 맞닿은 낯선 감촉에 얼어붙어 움직이니 않으니 박지민은 자연스럽게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너무 놀랐다. 너무 놀라서 방금까지 화가 나있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까먹었다. 갈 곳 잃은 손이 박지민의 허리와 팔 사이에서 배회하고 어색하게 뜨인 눈꺼풀은 박지민의 리드에 버거워 자꾸만 감겼다.

그렇게 우리는, 복도 한복판에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