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가족
러브 미로 14


짜아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박지민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여주
"⋯⋯미친새끼."

박지민이 맞은 뺨에 손등을 대며 웃음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모습이 마치 나를 장난감 대하듯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여주
"그동안 날 속인 값, 함부로 입 맞춘 값, 날 욕보인 값. 모두 다 합쳐서 이 정도로 친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


박지민
"후회할 텐데.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여주
"내가 알아서 해."

박지민은 마지막까지 속여서 미안하다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더 이상 박지민과 할 얘기가 없어 굳게 닫혀있는 강당 문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당기는 힘에 맞춰 문이 열렸고,


박지민
"그래도 잘 생각해 봐. 분명 나한테만 이득인 얘기는 아닐 거니까."

쾅!

박지민의 말에 대답할 틈도 없이 빠르게 닫혔다.


나는 교실에 들러 가방을 챙기는 것도 포기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가 일찍 끝났냐는 아주머니의 물음도 무시하고 오직 방만 바라보며 달리듯 걸었다.

여주
"하⋯⋯ 진짜⋯⋯."

모든 게 다 스트레스다. 의도치 않은 소문의 당사자인 김석진도 그렇고, 급식실에서 갑자기 아는 체한 김남준도 그렇고,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날 감싼 김태형도 그렇고, 내 위기를 기회 삼아 들이대는 박지민도 그렇고, 이놈의 한성 그룹도⋯ 그렇고.

무엇보다 학교에서 그 꼴을 보였으니 앞으로 어떻게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유일하다 할 수 있었던 박지민마저 친구가 아니었으니.

갑작스레 여러 일이 터지니 머리가 아팠다.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게 오늘 쓸 힘을 다 써 버린 듯하다.

여주
"⋯⋯아. 맞다. 김석진."

김석진에게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해명하는 걸 깜빡했다. 보나마나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기분 나빠하고 일을 텐데⋯.

나는 쉴 틈 없이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는 눈꺼풀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조용히 살 수 있길⋯⋯.'

이뤄지지 않는 소원을 중얼거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하교한 시간, 세 사람은 학생회장인 석진 아래 운영되는 학생회실에 모였다. 종종 따로 할 얘기가 있으면 모이는 그들이었지만 오늘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김남준
"태형아. 내가 잘 지켜보라고 했잖아. 눈앞에서 그 짓거리를 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


김태형
"시발, 내가 가만히 있고 싶어서 가만히 있었겠어? 그 새끼가 그딴 짓을 할 줄은 몰랐지. 그나저나 석진 형, 그 소문은 도대체 뭐야? 여주한테 무슨 짓 했어?"


김석진
"날 뭘로 보는 거야?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한성 그룹 식구라고 얘기하려고 하길래 가볍게 경고만 한 것뿐이야."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둥글게 둘러앉은 세 사람은 삐뚤어진 표정을 풀지 않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간간이 들리는 한숨에는 욕설이 섞여 흐른다.


김태형
"무슨 경고를 애한테 상처 주면서까지 해. 어깨에 손자국 난 거 못 봤어?"


김남준
"뭐? 여주 다쳤어?"


김석진
"⋯⋯의도한 건 아니었어."


김남준
"진짜, 형. 그건 아니지. 보니까 요새 더 말라가더만, 여주한테 그러는 건 아니지."


김석진
"⋯⋯."

태형의 말을 들은 남준이 무서운 눈빛으로 석진을 쏘아보니 석진이 남준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여주의 어깨에 닿았던 그 손이었다.


김남준
"하⋯⋯.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박지민이랑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이 난 게 다행이야. 아버지 귀에 들어가기 전에 멈췄잖아."


김태형
"그게 왜 다행이야. 차라리 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 난 게 나아."


김석진
"미쳤냐? 누구 하나 죽으라고 그딴 말을 해."

풀죽어있던 석진의 눈이 삐딱해졌다. 하지만 그런 석진의 시선을 받는 태형은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김남준
"그래. 지금 여기서 우리가 나서려고 해봤자 나아지는 건 없어. 전처럼 최대한 여주가 한성 그룹이랑 연관됐다는 걸 숨기고 박지민이랑 멀어지게 하려는 수밖에⋯⋯."


김석진
"하⋯⋯. 박지민이 여주를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몰랐는데."


김태형
"그게 다 형 때문이잖아. 괜히 그런 소문을 내서 기회를 만들어 버리면 어떡해."


김석진
"그래, 시발.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하다고. 여주도 나 때문에 다쳤고, 학교 소문도 이상하게 퍼졌고. 다 미안하다, 미안해."


김남준
"⋯오늘은 다들 예민하니까 서로 건들지 말자, 제발. 여주 혼자 집에 있을 것 같으니까 빨리 들어가고."

남준의 말에 하나둘 책상에서 일어나 자리를 정리한다. 어깨에 자신의 것 외의 가방을 하나 더 멘 석진이 학생회실 문을 여는 태형을 불렀다.


김석진
"어디 가. 집 안 가? 여주 괜찮나 보러 가야지."


김태형
"오늘은 형들이 좀 가."


김석진
"왜. 그나마 여주가 제일 안 불편해 하는 게 너잖아."


김태형
"아버지가 불러서. 아마 내일 등교도 거기서 할 것 같아."


김석진
"아⋯⋯. 그래. 몸 조심하고."


김남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저번처럼 더 얻어터지지 말고 좀 참아. 그러다 진짜 일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석진에게 인사하고 지나가려는 태형을 남준이 붙잡았다. 태형을 바라보는 눈에 언뜻 걱정이 비쳤다.


김태형
"어우, 잔소리.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형님들-. 난 형들처럼 공부를 잘하는 쪽도 아니고 부모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효자도 아니라서 그래. 난 나대로 알아서 테니까 걱정하지 마."


김남준
"⋯태형아."


김태형
"석진 형은 이따 여주 보면 사과 좀 해라. 이번엔 진짜 상처 받은 것 같더라. 어깨 상처 말고 마음의 상처."


김석진
"야, 씨⋯⋯. 알았다. 어차피 할 거였어. 너나 잔소리 하지 말고 가."


김태형
"응. 내일 봐."

석진과 남준을 향해 한 번 씨익 웃은 태형이 몸을 돌려 학생회실을 나갔다. 적적한 학생회실에 남아 태형이 닫고 간 문을 바라보는 석진과 남준 사이엔 차마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할 분위기만 유유히 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