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재]Catastrophe: 파국

"Catastrophe:파국" #01

상반신은 양달을, 하반신은 응달을 향해 그녀는 매일을 그러하듯 오늘도 애매모호한 경계에 누워있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이마 위로 손을 얹은 그녀는 초점잃은 눈과 함께 조용히 숫자를 읊조리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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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셋을 세고 난 직후 벌떡 일어난 그녀의 앞엔 험상궂은 헌터가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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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아가씨, 이곳을 지나간 뱀파이어를 못 보셨나? 꼴에 꽤 좋은 옷을 두르고 있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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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 오늘 줄곧 이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않고 있었지만 뱀파이어는 커녕 사람조차 보질 못했는걸요"

생긋이 헌터를 향해 웃어보이던 그녀가 극 중의 대사를 읊듯이 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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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흐음, 분명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정말 못 본건가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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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그렇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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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젠장. 요새 통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을 잡을 수 가 없어! 달린 돈이 얼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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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이번엔...현상금이 얼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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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5억 달러!! 무려 5억 달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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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엄청나네요....아, 벌써 해가 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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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음, 벌써 그렇게 된건가...오늘은 글렀군. 아가씨도 얼른 집으로 가게. 뱀파이어는 늘 그렇듯 조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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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네...명심할게요"

헌터가 그녀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고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그녀의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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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오늘도... 지나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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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여왕 폐하, 무려 10초나 지났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러십니까...?"

그녀는 나무 뒤에서 들려오는 한 남자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고 입가엔 어느새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으며 까맣던 두 눈동자는 와인보다 더 진한 붉은 색이 되어있었다

사실 그녀는 뱀파이어다. 다른 뱀파이어와 다르게 무수한 연습 끝에 '인간화'가 가능한 유일한 뱀파이어가 된 그녀였고

인간이라는 양달에 의해 응달에 숨어살야만 하는 벰파이어제국의 13대 여황제로 제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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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그냥...궁금했어. 우리의 목숨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건지 말야.."

지친기색이 역력한 그녀가 힘없이 그녀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충신, 태형의 질문에 답했다

"ㅋ,큰일났습니다!!! 마을에..!!!"

그때, 그녀만큼이나 진한 붉은색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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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감히 여왕폐하께 예를 갖추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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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급해보이는데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인간들이..!! 인간들이 쳐들와 모조리 죽이고 있습니다!!!! 간신히 몇몇은 피했으나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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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ㄱ,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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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ㅇ,아냐...그럴리 없어. 난 분명..!!!!"

300년 가까이 자신의 제국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늘을 비롯해 수많은 나날들을 양달과 응달, 인간과 뱀파이어라는 애매한 경계선을 드나들었던 그녀의 노력이 거품이 되어 코 앞에서 터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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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지금 당장 가봐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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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여왕폐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당장 피하셔야죠! 분명 수많은 기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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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너야 말로 무슨 소리야!! 스승님이 저기 계셔!! 그 뿐인 줄 알아!? 아직 살아남아있을 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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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폐하!!! 제발!! 폐하가 없으면 이 왕국에도 미래가 없다는 걸 잘 아시면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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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김태형...아니, 태형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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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나 오빠 말대로 이 나라를 책임져야하는 사람이야!!! 오빠 눈에 철없는 정여은으로 보일지 몰라도 지금의 난 여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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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겁먹었다면, 저딴 인간들에게 겁먹은 거라면 얼마든지 도망쳐 허락할게 내가..."

그녀의 붉은 두 눈도 지금 이 순간의 책임감보단 진하지 않은 걸까

그녀는 태형의 만류에도 결국 다시 인간화를 한 채로 마을로 향했고 고개를 푹 숙여버린 태형도 이내 그녀의 뒤를 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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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ㅅ,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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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폐하...대체 왜 이곳에 오신겁니...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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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스승님!!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죄송합니다...끄흑..끕...전부..제 탓 입니다...제가 너무 소홀했습니다...끅...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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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여왕...폐하....폐하는.....최선을 다하셨잖..습니까..."

그녀의 인간화를 도왔던 하나뿐인 그녀의 스승은 이미 인간에게 처참하게 변을 당한 뒤였다.

심장엔 인간의 잔인함 만큼이나 깊게 말뚝이 박혀있었고 말을 내뱉는 것 조차 고통스러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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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폐하.....여왕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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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말씀을 아끼셔야죠!! 제발...절 두고 가시면 안돼요...끅...끄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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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여왕폐하...시간이 얼마...쿨럭...컥....하아...얼마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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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폐하...모든게 잠잠해지면...그땐 인간 황제를 만나러 가십시오...커흑....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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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스승님...!!! 제발..정신을 차리세요!! 제가 고통스럽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제발....으흐흑....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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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명심하세ㅇ....제가 가르쳐드렸던...전...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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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ㅅ...스승님....안돼..요...안된단말입니다!! 끄흑...끕....흐윽..."

인간화한 모습이 자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품에 안긴 스승은 새하얀 색이 아닌 인간다운 색을 띄는 그녀의 뺨을 어루어만지더니 이내 눈을 감고 말았다

여황제인 그녀는 스승을 끌어안은채 계속해서 자신을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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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나..때문이야...끄흑...내가..으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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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여왕폐하, 자책....하지 마십쇼. 다 제 불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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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은

"오빠 말이 맞았나봐....평소답지 못해서...그래서 그랬나봐....닥치고 숫자나 셀걸...모든게 금갔어..!!! 이 제국도!!! 스승님도!!! 전부 사라졌다고!!!...끄흐흑...."

한 치의 오차조차 없이 매일같이 양달과 응달의 경계선에서 제국을 지켜왔던 그녀의 노력은 하루아침에 그녀에게서부터 등을 돌려버렸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주제넘은 호기심이 그 원인일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을 그녀 앞에 처참히 무너진 제국의 잔해들이 그녀에게 애처롭게 말하고 있었다

양달과 응달, 인간과 뱀파이어의 경계선.

서로의 안전을 위한 평화의 선이라 믿었던 그 경계선은 지금 이 순간 무너져버렸음을.